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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Sep 08. 2019

무를 새도 없이… 물러가는 것들

2019년 9월 8일 일요일의 딱 한 장


  당신은 나에게 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면 묘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오늘에야 어떤 감정인지 깨달았다. 그건 흐릿한 모욕감에 가까웠다. 나의 이름이 당신의 주머니 안에서 구깃해지는 것 같았다.


  한 정거장 떨어진 위치일 뿐인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까지 걸어갔다. 북토크가 있었고, 행사가 끝나갈 때쯤엔 내 옆자리에 한 젊은 소설가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몇몇 부분에선 울컥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익숙한 목소리를 듣던 중 좋은 문장 몇 개를 떠올렸으나 곧 휘발되리란 걸 바로 알았다. 청중의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에는 왠지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나가버리고 싶었다. 나가서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엉망진창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엉망에 몰두하는 것을 내심 기꺼워한단 사실도 알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얼마 전에 사둔 무화과는 다 후숙 되기도 전에 곰팡이가 피어버렸다. 예쁜 것들은 금세 무른다. 습도 높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내가 단단한 껍데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계절이 바뀔 때의 바람과 그 바람에 섞인 냄새 속에서도 물렁해지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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