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이만큼 생각한다고요!
얼마 전 차장님이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박스 안에서 뭉개진 모습이었다. 케이크 박스를 거꾸로 들고 팔을 사정없이 휘저은 것처럼 처참히 망가져 있였다. 아이의 생일을 맞아 아침에 축하해주려 새벽 배송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저 상태로 도착했다고 했다.
- 신경 좀 써서 배달해주시지, 다른 것도 아니고 생일 케이크인데.
케이크는 30구짜리 달걀 한 판 못지않게 조심히 다뤄야 할 식품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왜? 달걀처럼 깨지는 것도, 한 번 살 때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비싼 것도 아닌데? 장바구니 안에 아무렇게나 집어넣고 와서 모양이 일그러지고 크림이 뭉개져도 맛만 좋을걸?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케이크를 고를 때 보통의 음식과는 다른 무언가를 기대한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혹은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 케이크를 선택하고 상자에 포장하고 초에 불을 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번 생일에는 가족과 자를 케이크를 함께 골랐다. 음 사실 함께 골랐다기보다는, 주말을 맞아 집에 내려갔더니 케이크를 사러가는 길이라기에 얼떨결에 따라갔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다른 사람의 생일이라면 결코 고르지 않았을 소박한 아이로 선택했다. 동네 빵집에서 파는 작은 사이즈의 생크림 케이크.
선물할 요량이었으면 이곳저곳 검색한 후 개인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주문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디저트로 유명한 카페에서 홀케이크를 예약해뒀을 거다. 그렇지만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고르라니. 쇼케이스 앞에서 가성비를 생각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청포도로 소박하게 장식된 케이크를 들고 나오며, 엄마는 “투썸에서 사자니까..”라고 머쓱하게 말했다. 그땐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생일 케이크가 아닌 모카빵을 사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생일 케이크는 식품의 영역에 속하지 않아. 애정의 증표 같은 거라고! 된장찌개와 꽃다발 중 케이크와 더 가까운 게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케이크는 자신을 먹이기 위해 사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엔 언어의 밀도가 조금 부족하게 느껴져, 좀 더 예쁘고 달콤한 케이크를 고른다.
촉촉한 제누와즈 위에 우유 생크림을 바르고 딸기를 얹은 흰 케이크일 수도, 꾸덕한 크림치즈가 샌딩 된 당근 케이크일 수도, 레터링이 녹아선 안 되니까 버터크림으로 프로스팅 한 알록달록한 바닐라 케이크일 수도, 집안 어르신의 생신이면 꼭 등장하는 화이트 초콜릿이나 모카나 고구마 케이크 같은 종류일 수도 있겠다. 들어가는 재료에 비해 턱없이 비싸고 몸에는 끔찍하게 안 좋을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이렇게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 정도 대가야 아무것도 아니지.
생일 즈음 만나기로 하면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그마한 케이크를 사들고 온다. 괜찮은데 뭐 이런 걸 사 왔어! 같은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뻔하고 사랑스러운 장면. 보통 생일 당일을 전후로 일주일 정도 그런 상황이 연출되곤 하는데, 얼마 전에는 조금 오래 묵은 생일 축하를 받았다.
정신 바짝 차리고 놀아야 하는 가을 날을 맞아 한강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꽃무늬 의상(빨간 머리 앤처럼 표현해봤다)을 입은 여성이 저쪽에서 살랑살랑 걸어오는데, 손에는 케이크 말고 다른 것이 담겨 있을 것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파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거 뭐야? 어쩌면 굉장히 정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일은 두 달 하고도 열흘이나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건 정말로 나의 생일 케이크였다. 뭐야아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란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거다. 시원한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고, 해가 넘어가는 하늘은 비현실적인 색으로 물들었다. 행복하려고 굳게 결심한 사람들처럼 서울 시민들은 한강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뭐든 열심히 하고야 마는 그 전투적인 성향에 감탄하며 (결심이나 노력할 필요도 없이) 행복해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는 꽤 괜찮은 케이크를 판다. 내가 앉아서 글을 끄적이는 동안 여러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미리 예약해둔 케이크를 픽업해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케이크가 상자에 닿지 않게, 속절없이 부드러운 크림이 무너지지 않게, 그리하여 온전히 예쁜 모습으로 전달하려고 팔을 불편하게 구부린 모습.
지금까지 나는 몇 개의 케이크를 받았을까. 그들도 쇼케이스 앞에서 나를 생각하며 케이크를 골랐을 거다. 한 사람을 위해 마음을 쓰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들 시간과 정성을 쏟아 사람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도.
누군가 자신의 소중한 이를 위해 종이 상자를 소중히 들고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출처 없는 그리움 같은 것들이 피어오르고, 괜히 친구를 불러내 홍차와 레몬 케이크 어때요 묻고 싶네. 아니면 따뜻한 커피와 티라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