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청계천 헌책방을 지나가다 <오래 준비해 온 대답 김영하의 시칠리아>란 책이 눈에 띄었다. 나도 십여 년 전 시칠리아에서 얼마간 머물렀던 추억이 있어 호기심에 샀다. 책에서 작가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정착민으로 살다가 해외에 사는 첫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글쟁이라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썼다 생각하며 읽다가 문득, ‘어, 이거 내 이야기네!' 하며 빠져들었다.
김영하보다 십삼 년 전인 1995년 여름, 남편이 홍콩으로 발령이 났다. 남편과 나는 다섯 살 난 아들과 삼십오 년의 대한민국 삶을 접고 홍콩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당시는 시부모와 한집에서 살고 있어 딱히 이삿짐이랄 게 없었다. 가방 몇 개에 식구들의 옷가지와 개인용품을 꾸려서 여행하는 기분으로 왔다. 남편과 아들이 직장과 학교로 집을 나서면 나는 집에 필요한 가구며 부엌용품을 사러 홍콩 거리를 헤집고 다녔다. 신혼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 같은 설레는 마음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당시 홍콩 집 부엌에는 냉장고와 오븐, 식기세척기가 붙어있었다. 방마다 에어컨이 달려있고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세탁물 건조기가 있어 신기했다. 처음 보는 제습기는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냈는데 외출하고 와보면 제습기 통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습한 나라라 제습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살면서 알게 됐다. 낯선 나라 홍콩은 서서히 우리 가족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고 그사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휑한 집에는 장식장이 들어섰고 아들은 새로 산 피아노를 거실에서 쳤다.
홍콩에서 살다 미국으로 가게 됐다. 두 번째 이주민이 됐을 때는 짐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홍콩은 돈만 있으면 세상의 온갖 좋은 물건을 면세로 살 수 있는 쇼핑 천국이었다. 미국으로 가기 전 나는 유럽산 그릇을 언제 또 살 수 있을까 싶어 주섬주섬 사서 짐에 보탰다. 늘어난 짐을 추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부칠 짐을 챙기고 쓸모가 없어진 것을 버리기 등. 이사하는 일이 국경을 넘을 때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삿짐 회사 담당자가 와서 견적을 내고 해외 이사 보험용이라며 이삿짐 목록표를 내밀었다. 김영하의 말처럼 정주민의 삶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려면 그 모든 물품에 일일이 가치를 매겨야 했다. 하나씩 사 모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이삿짐으로 분류되니 일거리였다. 영수증을 들춰 당시 가격에다 감가상각을 고려해 가치를 매기는 일은 시간이 걸렸다. 목록을 만들고 보니 달랑 세 사람인 우리 가족의 이삿짐이 이렇게나 많나 싶어 놀랐다.
아파트에서 살았던 홍콩보다 텍사스에서는 더 많은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잔디와 나무가 있는 집에서는 잔디 깎는 기계와 가을이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모으는 쇠갈퀴 등 정원용 도구가 필요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쇼핑을 하려니 차도 필수였다. 마리를 입양하여 식구도 늘어났다.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을 흉내 내느라 부엌에는 커틀러리 세트와 오븐으로 빵을 굽는데 필요한 도구가, 차고에는 차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장비며 잡다한 물건이 쌓였다. 산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환불해 주는 ‘소비자가 왕'인 미국식 생활에 젖어 오 년을 살았다.
다음은 카타르였다. 2000년대 카타르는 테러 위험이 있는 곳이라 회사 직원 가족은 총기로 무장한 경비대가 지키는 넓은 주택 단지에 모여 살았다. 모든 가구가 마련되어 있으니 개인 짐만 가져오라는 회사의 지침에 따라 십여 년 전 홍콩에서 장만했던 장식장, 식탁과 의자 등, 덩치 큰 가구를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미국 갈 때 썼던 보험용 목록을 수정하여 이삿짐 회사에 제출했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이사를 하게 되니 묵은 짐을 솎아내는 이점은 있었다. 공항에서 새로운 거처로 가는 차 안에서 바라본 도하는 온통 흰색이었다. 처음 보는 아랍어 간판과 건물들, 비포장 모래길은 여태까지 경험했던 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 집’은 모든 것이 갖춰진 단독 3층짜리 집이었다. 가구, 소파, 침대는 물론이고 부엌에는 정찬용 식기와 매일 쓰는 그릇이 구비돼 있었다. 서양식인 정찬용 식기가 일본 도자기 회사 노리타케 제품임이 특이하여 기억에 남았다. 회사는 가족 수를 고려하여 집을 배정했는데 세 사람과 마리가 살기에 충분이상이었다. 집모양이 획일적이어서 개성은 없었지만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수고 없이 회사의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살았다.
카타르에 사는 동안 아이가 대학 진학을 계기로 독립을 해서 집을 떠났고 마리는 이 세상과 작별을 했다. 정주하지 못하는 삶이 계속되는 가운데 카타르에서 한국으로, 싱가포르로, 인도로, 다시 싱가포르로, 집주소는 계속 바뀌었다. 인도에서는 육 년을 살았다. 결혼 후 이동 없이 한 곳에서 제일 오래 머무른 집이고 나라였다. 싱가포르로 발령이 나고 인도에서 썼던 대부분의 살림살이를 처분했다. 식구가 주니 짐이 단출해졌다. 싱가포르에서는 트렌디하다는 북유럽 가구를 샀다. 먼지와 공해로 꼭꼭 닫고 지냈던 뉴델리의 집과 달리 창문을 열면 새소리가 들리는 새 가구로 단장된 싱가포르 집은 쾌적했다..
싱가포르에서 직장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남편이 도쿄에서 살아보자고 제안했다. 한국에서 가깝고 살기도 편할 것 같아 적극 찬성했다. 자의로는 첫 외국살이였다. 도쿄에서의 삶을 상상하며 다시 짐을 꾸렸다. 도쿄의 집들은 작다고 들어 소파만 놔두고 손때 묻은 지 얼마 안 된 가구와 헤어졌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하여 마련한 것이라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도쿄의 새 집으로 이삿짐을 옮기는데 문제가 생겼다. 집의 구조상 소파가 좁은 복도를 지나 방문 크기의 거실 입구로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별 궁리를 다하다 어쩔 수 없이 대형쓰레기 딱지를 붙여 폐기처분을 했다. 뜻하지 않게 일본에 사는 동안 미니멀리스트로 살았다. 도쿄 거리에 사람이 많은 이유가 집이 갑갑해서 밖에서 헤매나 하고 생각했을 만큼 도쿄의 집들은 작았다. 소파 없는 집에서 좌식 생활을 하게 되자 남편은 일어났다 앉았다를 불편해하며 투덜거렸지만 가구라고는 식탁만 있는 집에서 나는 몸에서 살이 빠져나간 것 같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2011년 일본에서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는 그때 타격을 입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원인이었다. 그때 직접적인 지진 피해도 컸지만 땅이 흔들리자 집에 있던 가구와 쌓아 둔 짐에 깔려 생긴 희생자도 많았다고 했다. 그 후 일본인들의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버리며 살기, 쌓아 두지 말기가 삶의 모토가 되어 단순한 생활을 이어가는 바람이 분 것이다.
한국에 자리 잡은 지 삼 년이 되어간다. 도쿄보다 큰 집에서, 문이 두 개 달린 냉장고를 쓰며, 내키만한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살고 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박경리 선생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우리 모두는 노마드(유목민)처럼 노마드랜드(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묵은 짐, 묵은 옷가지, 묵은 생각을 한 번씩 털어내고 정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202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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