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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기

『대온실 수리 보고서』

by 새벽

(김금희, 2024)


창경궁 대온실 보수공사를 기록하기 위해 채용된 강영두. 얼떨결에 하게 된 그 일이 창경궁 앞 원서동에서 보냈던 중학교 때의 기억을 소환한다. 소설은 20년이 지나 재구성되는 영두의 이야기와 대온실에서 삶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경험했던 마리코 할머니의 이야기가 서로 엮이며 전개된다. 요즘 소설은 짧고 가독성 높은, 직접적이며 매운맛의 표현이 많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 소설은 비교적 길이감 있게 (411쪽) 꼼꼼한 역사적 고증과 온실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두 내러티브를 순한 맛으로 엮었다.


마리코 할머니는 “바구니에 얹어 나온 생선들 잇몸까지 시려 보였던 “ 매섭게 추웠던 어느 날, 강화 포구에서 영두의 외 할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강화엔 왜 갔냐는 영두의 질문에, 아버지의 고향이었다고 말하는 할머니. 일본인 엄마가 재혼한 한국 남자. 어린 마리코는 그를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된 마리코는 가난하고 추웠던 어느 날 아버지의 고향인 강화 포구를 찾아 그곳에 서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 할머니가 사는 내내 강화 출신의 기나시타 코주 (박목주)는 자신과 동생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유일한 아버지였을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할머니의 몇몇 장면은 아직도 가슴을 먹먹하게 내리누른다.


개항 시기부터 광복과 한국 전쟁을 거쳐 2000년대까지.

한국인 새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던 일본인 여자아이 마리코가 원서동 낙원 하숙의 주인으로 살 때까지. 마리코 할머니의 서사는 우리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거치며 강하게 때론 거칠게 살아남아야 했던 한 개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고 있다. 잠시지만 가까이서 그녀를 지켜보았던 영두는 20년이 지나 대온실과 얽힌 할머니의 비극을 파헤치면서, 피하기만 했던 자신의 트라우마도 마주하고 스스로 상처에서 벗어난다. 원서동, 창경궁이란 소리를 들어도 더 이상은 ‘축축하고 차가운 이불을 덮은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지지’ 않을 정도로. 결국은 백서를 쓰지도 못하고 일에서 손을 떼야했지만, 영두는 석모도에서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시간을 묻고 건너뛰었던 아픔이었는데,

적어도 이젠 건너뛰었던 그때를 떠올릴 수도, 비었던 부분을 메울 수도 있게 됐으니.

굴곡진 생을 담담하게 살다 떠난 마리코 할머니도,

원서동에서, 중 2에 멈췄던 영두도,

수난의 역사를 버텨온 대온실도,

각자의 모습으로 버티며 살아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난 김금희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 (영두, 열매, 복자)을 좋아한다.

어디서든 눈에 띄거나 인기가 많을 인물이 절대 아니고, 남들에게는 자주 투명인간이 될 그런 여성들인데.

조용히 단단하게 힘 있게 살아내는 그런 인물들 같아서인가...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 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 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17)


“그때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깝지 않고 무섭지도 않은 할머니는. 어떤 앞날이 보였기에 아깝지 않고 무섭지 않았을까.” (95)


“얼마나 추운 겨울이었는지. 강화포구 시장에서였는데, 바구니에 얹어 나온 생선들 잇몸이 다 시려 보였지.” (97)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군가를 믿기도 해.” (102)


“나는 좋은 부분을 오래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156)


“얼른 가서 무화과나무가 있는 마당을 지켜보며 마루에 누워 섬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정작 마을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물결치는 소리만이 섬 소리의 전부는 아니었다. 배를 타고 나갔다 빈 배로 돌아온 사람들의 불평 소리, 어느 집에서인가 쓰레기를 쌓아놓고 타닥타닥 태우는 소리, 밥을 짓거나 부엌에서 그릇을, 외할머니가 ‘설음질’이라고 부르던 것과 똑같이 설렁설렁 닦는 소리, 말린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들의 착지, 마을 노인정에서 들려오는 노래방 소리, 소라껍데기에 귀를 가져다 대고 그 안에서 바닷소리를 발견해 내듯 그런 섬의 소리를 변별하다 보면 다시 평정이 찾아올 것이다.” (345)


“기념도 추모도 없는 이 상태가 가장 진실에 가까워 보였다. 무언가 들어서 있다면 오히려 그 긴 이야기를 지우는 듯했을 거였다.” (396)


“아니란다, 영두야.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 (403)


“그때는 할머니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403)


창경궁 대온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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