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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기

『책 읽어주는 남자』

by 새벽

(베르하르트 슐링크, 1995)


<The Reader>라는 영화 때문에 읽게 된 소설이었다.


15년 전쯤 영화와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소설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출간된 『책 읽어주는 남자』로 읽었다.


나이를 훌쩍 먹은 탓인가... 이젠 미하엘이란 햄릿형 인물을 이해하다 못해 공감하기까지 한다. 예전엔 한나의 재판 과정에 끼어들지 않던 모습, 한나가 글을 읽게 됐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편지에 개인적인 내용을 쓰지 않는 모습 같은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젠 그의 소극적?인 모습이 최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나의 태도는 마치 한 달 한 달 죽지 않고 살아남아 강제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져 가면서 새로 오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무심하게 기록하는 수감자 같았다. 나는 살인과 죽음을 직접 목격했을 때 그런 수감자가 느꼈을 것과 똑같은 마비 상태에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든 기록은 이러한 마비 상태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133)


“이러한 마비 상태 속에서 삶의 기능은 최대한도로 축소되고,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 무자비하게 되고, 가스 살포와 화장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 그들은 마취되거나 술에 취한 듯한 무자비와 무관심, 불감증을 보였다.” (134)

미하엘이 전범 재판정에 선 피고인들이나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서 느꼈다는 이 ‘마비증세’가 새삼 소름 끼치도록 끔찍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참담한 일이든, 그저 약간 취한 듯, 무관심하게 일상을 살아갔던 수많은 사람들. 굳이 한나 이랜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과 연관을 짓지 않더라도, 그들은 어느 시기든, 어떤 사회에서든 존재하는 이들일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어쩌면 나도 그들 중 하나 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떻게 마취되지 않고 늘 깨어있을 수 있을까...


아플 때 도와준 한나에게 무작정 빠져들었던 미하엘은 다시 열다섯 소년의 일상을 살게 되자, 친구들 앞에서 그녀를 모른 척했다. 그녀가 사라지자 그리움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꼈고, 세월이 흘러 법정에 선 그녀를 보며 다시금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한나의 자살 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그녀를 부인하고 배반한 것은 아닌지 죄책감을 느낀다.


예전엔 미하엘이 평생 시달린 이 죄책감의 정체가 꽤 궁금했던 것 같다. 소년이 중년 여성에게 끌린 건 오로지 에로틱한 감정이었지 사랑이 아니라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죄책감마저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하엘은 그답게 한나를 존중하고 평생 사랑한 거라고도 생각한다.


“그녀의 얼굴은 특별히 평화스럽지도 특별히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굳어 있었으며 죽은 듯이 보였다.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자니 죽은 얼굴에서 살아 있는 얼굴이 떠올랐다. 늙은 얼굴에서 젊은 얼굴이 말이다. 늙은 부부들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에게는 늙은 남자의 모습 속에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을 것이고, 남자에게는 늙은 여자의 모습 속에 젊은 여자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신선하게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262)


“나는 또한 나의 그리움이 그녀 하고는 상관없는 형태로 그녀에게 고정되었음도 깨달았다. 그것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264)


문맹임을 숨기고 싶었던,

그래서 다소 억울하게 오랜 시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하지만,

점차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와 수많은 생명의 무게를 깨달았을 그녀.


어쩌면 그래서 순순히 종신형을 받아들이고 수형 생활을 했을지 모를 여성과

평생 그녀를 떨구지 못했던 소년, 청년, 그리고 중년의 미하엘.



그래서 정말 무거운 주제를 많이 품고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아직 내게 러브 스토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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