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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화 Nov 02. 2024

꽃을보며 만나게된 나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아파트 앞에 있는 유림 공원에서 국화축제가 열린다. 그래서 며칠 전 저녁 무렵 신혼 때부터 알게 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이며 친구 같은 지인과 유림 공원을 다녀왔다. 입구부터 다양한 국화들이 멋있는 모습으로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다가가 보니 국화꽃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다양한 국화꽃으로 터널을 만들어놔서 터널 안으로 지나갈 때는 꽃 속에 묻혀 있는 황홀함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무서운 호랑이와 돼지 기린 에게도 여러 가지 다른 색과 모양의 국화꽃으로 장식해 놓아서 나도 모르게 그들을 배경 삼아 포즈를 취하게 되었다.


 국화축제이지만 국화보다 다른 꽃들이 더 많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꽃이 있었다. 특히 국화 사이사이에 이름은 모르지만 어릴 때 많이 보았던 익숙한 꽃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화단에서 피웠던 그 꽃이구나. 그때는 네가 예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너무나 예쁘고 아름답고 정겹고 친숙하게 느껴지는구나.’라는 마음을 담아 미소로 반응해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우리 집 앞마당 화단에 여름이면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 채송화, 달리아, 장미, 등등 그 외 이름은 잘 모르지만, 노란색, 빨간색, 보라색 등등 예쁜 꽃들이 있었다. 가을이면 국화와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등도 해마다 그곳에서 기쁨을 주었다. 잊혀진 꽃들을 생각지도 못했던 국화축제에 가서 보니 너무 반가웠다. 꽃은 한해살이지만 꽃씨가 떨어져 겨우내 땅속에서 견디다 봄이 되면 새싹이 되어 고개를 내밀며 싹을 틔운다. 싹이 점점 자라 꽃이 피고 지면 씨를 맺고, 꽃씨가 떨어져서 그 자리에서 죽은 척하고 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다음 해 봄이면 새싹으로 돋아나는 것을 반복한다. 씨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회상하다 보니 ’나도 꽃씨를 닮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골에서 마냥 놀기만 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에릭슨의 심리 사회적 발달 단계 중 7단계까지 잘 통과한 것 같다. 통과 하면서 꽃씨와 같이 때로는 죽은 척할 때도 있었지만 어려움을 이기고 당당하게 현실에 적응하며 인생 후반전까지 잘 달려온 것은 열심히 달려온 결과다. 반면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저버리지 않으려고 감정을 숨기고 적당히 방어기제를 사용하며 살기도 하였다. 달려오는 과정에서 분명 상처도 있었을 터인데 힘들었던 상처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애써 잊으려고 무의식에 저장해 둔 채 달리기에만 급급했던 나를 이제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융 심리학과 기독교 영성의 저자 에르나 반 드 빙껠은 ”가장 위대하고 진정한 앎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앎에 관해서 탐구해야 한다. 그대가 그대 자신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그대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대가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고 그대 자신을 망각한다면 그대에게 돌아오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그동안 나는 나를 탐구하기보다 그리고 감정을 알아차리기보다 그때그때 필요를 채우기 위해 분주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의 감정을 몰라주면 섭섭하게 느껴져서 감정적으로 대처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더 당당하게 살아갈 것 같은 희망으로 박사 학위에 더 매진했던 것 같다. 결국, 박사 학위는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고 성공 경험이었다. 덕분에 자존감도 향상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묻어두고 감추어 두었던 나를 많이 발견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보고 싶지 않아 묻어둔 부정적인 감정을 다 알아차리지도 못하여 나의 삶을 방해할 때가 많다. 

    

 우리 집 화단에 피웠던 꽃들이 씨가 되어 떨어져서 겨울을 잘 견디고 이듬해 새로운 꽃을 피우게 했듯이 나도 살아오면서 넘어질 때도 있었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오늘까지 병화의 꽃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은혜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부모님이나 가족들 주변 사람들이 말했던 말이 나의 무의식중에 저장된 칭찬의 말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비언어가 주는 메시지도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 이미지들이 통합되지 못하고 보이는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는 살았지만, 끝도 없고 채워지지 않은 욕구는 점점 더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그 욕구에 반응하다 보니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살 때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나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나의 성장을 도와준 남편 탓으로 돌릴 때가 많았다. 그 결과 별것 아닌 것으로 갈등으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남편을 잘못 만나 내가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방어하며 탓하면서 살았고, 지금도 조금만 방심하면 감정에 휘둘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대처하기가 편리하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상처는 나를 성장하게 해준 원동력이며 행복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재인식하며 남은 인생은 그동안 바쁘다고 방치했던 나와 자주 만나 나를 더 알아가며 나를 사랑해 줄 것을 약속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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