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예순이 넘으면, 한 번쯤 채석장 청소부로 살아보는 것이 좋다.
삶의 뒤안길에서 맞닥뜨리는 이 자리에는
젊은 시절에는 도무지 들리지 않던 존재의 목소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채석장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우호적인 땅이 아니다.
바람은 돌가루를 날리고,
하늘은 늘 흐릿하며,
발아래는 삶의 잔해처럼 부서진 석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땅 위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이곳이 내 삶의 끝자락이 아니라,
내 존재가 다시 깨어나는 시원(始原)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삽을 드는 일은 노동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묵언의 수행이 되었다.
삽날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을 때의 금속성 울림은
내 마음속 가장 깊은 퇴적층을 흔들었고,
거친 바람은 오래된 후회와 슬픔을 조금씩 털어내주었다.
나는 비로소 알았다.
사람이 반드시 한 번은
육체의 고단함을 통해 마음을 정화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반복되는 삽질을 하던 어느 날,
시시포스가 떠올랐다.
그의 영원한 노동은 신의 형벌이었으나,
나는 삶이라는 장터 한가운데서 전혀 다른 생각에 이르렀다.
‘만약 그 돌을 산 위로 올리는 일이 그의 존재를 회복하는 길이었다면?’
그 순간, 반복은 형벌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재건하는 과정,
낡은 나를 허물고 새로운 나를 세우는 의례(儀禮)로 느껴졌다.
그 순간 나의 삽질은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시시포스의 돌처럼
나 역시 내 안의 무거운 심연의 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삽질의 삶은 성공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순하고 무한 반복되는 행위 자체가 삶에 다시 ‘방향’을 부여했다.
채석장에서 만난 동료들은
삶의 철학을 글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묵묵함과 배려는
어떤 문장보다 더 깊은 가르침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과거를 묻지 않았고, 지금의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함께 땀을 흘리는 그 순간,
사람 사이에는 말보다 더 오래 머무는
선한 온기가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채석장은
몸이 회복되는 장소를 넘어
마음이 다시 태어나는 성지가 되었다.
나는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나의 얼굴,
‘되고 싶었던 나’를 조용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채굴이 완료된 장대한 바위산에서 문득 어떤 이미지를 발견했다.
어린 시절 가슴속에 새겨두었던 큰 바위 얼굴.
평생 자신이 닮고자 했던 얼굴을 바라보다
마침내 그 얼굴이 되어버린 소설 속 인물 이야기.
그 믿음, 그 성실함, 그 조용한 인내,
그것이 바로 인간이 꿈을 꾸는 방식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얼굴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삶이란 결국,
자신이 닮고자 하는 얼굴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일.
꿈을 잃어버리면 그 얼굴도 잃어버리지만,
꿈을 회복하는 순간 그 얼굴이 다시 빛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예순이 넘으면, 한 번쯤 채석장에서 삽을 들어보라고.
그곳은 사람을 낮추는 땅이 아니라,
사람이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고.
삶의 본질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 묻고,
오염된 사회에서 오염된 자신의 시간을 정화하며,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되찾는 자리, 채석장 청소부!
나는 그곳에서 다시 나를 세웠고,
다시 꿈을 품었으며,
마침내 내가 닮고자 했던 얼굴을 다시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