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표 없는 사람

by leolee

어느 날부터인가 돈 이야기는 갑자기 튀어나온다.
미리 예고하지도 않고, 특별한 사건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그냥 평범한 하루의 틈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다. 그날도 그랬다. 시험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고, 학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아이들은 다음 시험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교무실에서는 그다음 학기 반 편성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시기였다.

나는 그날도 평소처럼 수업을 마치고 리란의 가게로 향했다. 약속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쪽으로 발걸음이 갔다. 요즘은 그랬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 가게 앞에 서게 되는 날이 많아졌다. 큰 쇼핑몰 안에 있는 리란의 가게는 골목처럼 좁은 통로에 붙어있는 가게들 사이에 있다. 인천길이라는 한국에 온 것 같은 길에 있다. 필사 동대문 도매시장을 보는 분위기이다. 가게 안으로 보이는 옷걸이들, 정리된 진열대, 계산대 옆에 놓인 작은 노트. 가게 안은 늘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사람이 버티며 살아온 흔적이 있었다.

매장으로 들어가자 종이 울렸다.
리란은 계산대 뒤에 서서 숫자를 적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왔어?”

“응.”


나는 가게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거리도 한산했다. 리란은 잠시 숫자를 적다가 펜을 내려놓고 내 쪽을 봤다.


“오늘은 일찍 끝났네.”

“시험 끝나고 나면 좀 그래.”

“그래 보이더라.”


그녀는 다시 계산대 위의 노트를 넘겼다. 나는 무심코 그 노트를 바라보다가, 거기에 적힌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출, 비용, 날짜. 익숙한 듯하지만 내가 늘 피해왔던 종류의 숫자들.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괜히 들여다보면, 쓸데없는 생각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때 리란이 말했다.


“이번 달은 좀 빡셀 것 같아.”


그 말은 아주 담담했다. 불평도 아니고, 하소연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어조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왜?”

“비 오는 날이 많았잖아. 손님이 확 줄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산대 아래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임대료 고지서였다. 숫자는 구체적이었고,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그 숫자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를 해야 할지, 조언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리란은 내 침묵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다음 달에 신상 좀 들어오면 회복돼.”

“괜찮아?”

“응. 안 괜찮으면, 방법을 찾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안 괜찮으면, 방법을 찾지.’

그녀에게 그 말은 결심도, 각오도 아니었다. 그냥 기본값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안 괜찮을 때, 나는 먼저 버티려고 한다. 참고, 미루고, 견디다가, 그다음에야 겨우 방법을 생각한다. 리란은 달랐다. 안 괜찮음을 인정하는 순간,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나는 그 차이를 그날 처음으로 또렷하게 느꼈다.

잠시 후, 가게 문이 열리고 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 리란은 익숙하게 응대했고, 나는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가 옷을 설명하는 목소리, 가격을 말하는 방식, 흥정이 들어왔을 때의 태도. 그 모든 것이 단호하면서도 유연했다. 싸게 팔지 않았고, 필요 없는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격표를 숨기지도, 과장하지도 않았다.

손님이 나간 뒤, 리란은 물을 한 잔 마시며 말했다.


“아까 그 손님, 가격 물어보고 망설였지?”

“응.”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은, 결국 사.”

“왜?”

“안 사는 사람은 고민도 안 해.”


그 말은 장사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내 삶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늘 고민하는 쪽에 속해 있었다. 이 일을 계속해도 될지, 여기 남아도 될지, 더 벌어야 하는지, 다른 길이 있는지. 고민은 많았지만, 결정을 내리는 데는 늘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메시지가 하나 왔다. 학교 행정팀에서 온 것이었다. 다음 학기 반 편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시간표가 일부 조정될 수 있고, 수업 시간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짧은 안내였다. 확정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은 분명히 언급되어 있었다.

나는 길 한가운데서 잠시 멈춰 섰다.
이런 메시지는 언제나 애매하다. 당장 큰 변화는 아니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줄어들 수도 있다는 말은, 준비하라는 말과 같다. 나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괜히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집에 도착해 불을 켜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 하루는 별일 없었던 것 같은데, 마음은 묘하게 무거웠다. 시험도 끝났고, 큰 갈등도 없었는데, 그 무게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가 아니라,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구조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계산기를 꺼냈다. 습관처럼 월 고정 지출을 적어 내려갔다. 월세, 생활비, 보험, 교통비. 그 숫자들은 이미 머릿속에 익숙했다. 여기에 수업 시간이 줄어들 경우를 가정해 몇 개의 숫자를 바꿔 넣었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버틸 수는 있다. 하지만 여유는 없다. 늘 그 지점이다.

그때 리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집에 왔어?”

“응.”

“오늘 얼굴 좀 굳어 있더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있는 그대로 적었다.


“학교에서 다음 학기 시간 줄어들 수도 있대.”

“아.”


그녀의 반응은 짧았지만, 그 뒤에 바로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래도 지금 수업 다 유료잖아.”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맞다. 지금 나는 이미 유료로 수업을 하고 있다. 예전처럼 ‘경험을 쌓는 단계’도 아니고, ‘무료로 도와주는 단계’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태도는 여전히 예전의 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학교 수업 줄면 영향 있잖아.”

“그럼 다른 데서 채우면 되지.”


그녀의 말은 언제나 단순했다. 하지만 단순하다고 해서 가벼운 건 아니었다. 그 단순함 뒤에는, 이미 수없이 그런 선택을 해본 사람의 경험이 있었다.


“너는 왜 항상 그렇게 바로 말해?”

내가 물었다.


“뭘?”

“대안 같은 거.”


리란은 잠시 후 이렇게 답했다.


“안 그러면, 가게 문 닫아야 하니까.”


그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녀는 선택하지 않으면 끝나는 구조 안에서 살아왔다. 나는 아직 선택을 미룰 수 있는 구조 안에 있었다. 그 차이가 우리의 말투를 다르게 만들고 있었다.

며칠 뒤, 학교에서 또 하나의 작은 사건이 있었다. 한 학부모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수업 만족도는 높지만, 비용이 부담된다는 이야기였다. 은근히 할인이나 조정을 기대하는 뉘앙스였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바로 양보했을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 앞에서, 나는 늘 약해졌다.

그날은 달랐다.
나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썼다가 지웠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답했다.


“현재 수업 방식과 비용은 유지됩니다. 다만, 수업 내용은 더 명확히 공유드리겠습니다.”


보내고 나서 손이 조금 떨렸다.
이게 맞는 선택인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떨림 뒤에 오는 감정은 후회가 아니라 안도였다. 처음으로, 내 시간을 내 기준으로 지켰다는 느낌.

그날 저녁, 리란의 가게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잠시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게 맞아.”

“혹시 너무 냉정했나?”

“아니. 냉정한 게 아니라, 정확한 거야.”


정확하다는 말이 그렇게 좋게 들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좋음’은 대체로 모호했다. 리란의 ‘정확함’은 달랐다. 경계를 분명히 하고, 책임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다시 계산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숫자를 지우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문장을 적었다.


‘내 시간에는 가격표가 있다.’


그 문장은 선언 같기도 했고, 다짐 같기도 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나와는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겠다는 약속이었다.

삶은 여전히 반복된다.
시험은 또 있을 것이고, 비자 연장은 또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모든 걸 참고 넘기지 않고, 최소한의 경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게 곧 경제적 자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날, 잠들기 전에 여권을 꺼내보지는 않았다.
대충 어느 날짜인지도 알기에 비자 날짜도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내일 해야 할 수업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수업에 붙일 가격과 시간, 범위를 다시 한번 적어보았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구조다.
하지만 이제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감각이 있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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