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비자

by leolee

시험이 끝난 뒤 며칠은 늘 그렇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의 공백.
아이들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고, 나는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수업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교무실의 공기는 다시 평온해지지만, 그 평온함 속에는 언제나 작은 잔향이 남아 있다. 잘한 아이들의 얼굴, 무너진 한 아이의 눈빛, 그리고 시험장 복도에서의 침묵.

그 침묵은 며칠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다른 것들과 섞여서 나를 찾아온다.


여권 만기 알림.
비자 연장 시기.
워크퍼밋 갱신 서류.


메일함 한쪽에 정리해 둔 폴더를 열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살아온 시간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중국에 처음 왔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행비자 한 달.
가방 하나.

돌아갈 날짜는 정해 두지 않았다. 그땐 그냥, 여기서 살게 될 줄도 몰랐고, 살고 싶다는 생각도 명확하지 않았다.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다.

어렵게 혼자서 찾았던 이 곳.

그다음은 취업비자.
그리고 워크퍼밋.
처음 받았던 그 검은색 여권 크기의 워크피밋. 여권처럼 생긴 그 작은 책자를 손에 쥐었을 때, 괜히 몇 번이나 넘겨봤던 기억이 난다. 마치 그 안에 ‘이제 너는 여기 있어도 된다’라는 문장이 숨겨져 있을 것처럼.

그 뒤로는 연장, 또 연장.
비자의 종류는 바뀌지 않았지만, 시간은 계속 쌓였다.
매년 여름쯤이면 같은 생각을 한다.
‘아, 또 이 시기가 왔구나.’

여권 유효기간이 1년 아래로 내려오면, 괜히 손에 잡고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아직 남아 있는데도, 마치 곧 사라질 것처럼. 비자 스티커가 붙어 있는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페이지가 많이 줄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도장이 늘어날수록, 여백은 줄어든다.

그게 이상하게도 삶과 닮아 있다.

교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동료가 무심코 말했다.

“쌤, 비자 또 연장해야죠? 이번엔 몇 년짜리예요?”

“1년이요.”

늘 그렇듯.


“아… 매년 귀찮겠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귀찮은 건 연장이 아니라, 반복이라는 생각.
같은 도시, 같은 건물, 같은 서류, 같은 질문.

‘왜 아직 여기 계세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세요?’


그 질문을 제일 많이 받는 건, 사실 나 자신이다.

요즘 들어 더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삶은 반복된다. 시험 준비, 시험, 결과, 다음 시험.
아이들은 바뀌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나만 조금씩 늙어간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혹시… 나는 하나의 중국 안에서 받을 수 있는 비자를 다 모으고 있는 건 아닐까.’


여행비자, 취업비자, 워크퍼밋.
체류 자격의 단계들을 하나씩 밟아온 셈이다.
마치 게임처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조건을 채워야 하는 구조.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웃기면서도 조금 씁쓸했다.

그러면… 다음은 뭘까.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두 단어가 떠올랐다.
결혼비자.
그린카드.

그 생각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그다음에는 조금 무거웠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현실처럼 느껴졌다.

결혼비자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리란의 얼굴이 겹쳐진다.
아이를 키우며 가게를 운영하고, 삶의 무게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
나의 비자 상태나 체류 조건을 묻지 않고, 그저 ‘여기 있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

그린카드는 아직 먼 이야기다.
그건 나라의 이야기이고, 제도의 이야기고, 내가 결정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결혼비자는…
어쩌면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조심스러웠다.
지금까지의 나는 언제나 ‘다음 연장’을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1년 뒤를 생각하고, 그다음을 유예하며, 늘 임시적인 상태로.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여권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페이지를 넘기며, 도장과 스티커를 하나하나 보았다.
이 도시에서의 시간들이 거기 다 찍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도장은 급하게 찍혔고, 어떤 도장은 꽤 공들여 찍힌 흔적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 근처에서 손이 멈췄다.
여백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때 메시지가 왔다.
리란이었다.


“오늘 늦어?”

“조금.”

“비자 얘기 또 생각났지.”


나는 잠시 멈췄다가 답했다.


“응. 티 나?”

“응. 너 그럴 때 말수가 줄어.”


그 문장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은, 내가 어떤 서류 앞에서 흔들리는지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가 천천히 타이핑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
이제 내가 가져 볼 수 있는 비자가… 몇 개 안 남았구나, 이런 거.”


몇 초 뒤 답장이 왔다.


“그래서?”


“아직은 그냥 생각만.”


리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참 뒤에 짧은 문장을 보냈다.


“생각하는 거 나쁘지 않아. 도망 안 치는 거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말.
비자를 연장하는 삶은 어쩌면, 계속 도망치지 않기 위한 선택들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권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아직은 정답을 내릴 단계는 아니다.
다만, 이제는 ‘다음 연장’만 바라보는 삶은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이 도시에서의 체류 방식도, 이름이 바뀔 수 있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오늘 밤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삶은 반복되지만,
반복 속에서 생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생각이 언젠가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 전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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