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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대해

by leolee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먼저 떠졌다.
시계는 6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교장과 한 번 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머리 한켠에 박혀 있어서인지,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별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단톡방 알림 몇 개, 광고, 택배 문자. 화면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어제 리란이 보냈던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괜찮아.
내일 잘 될 거야.”


어제는 그 말을 보고 겨우 숨을 고르게 만들 수 있었다.
오늘은 그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잘 된다’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학부모가 완전히 마음을 바꾸는 것일까, 교장이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큰 싸움 없이 이 일이 조용히 지나가는 것 정도일까. 어느 쪽이든, 내 마음 한 구석에 이미 작은 흉터처럼 남은 구절 하나가 있었다.


“이러다가 떨어지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책임.
그 단어는 교사라는 직업을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늘 따라붙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아이가 시험에 떨어지면, 부모는 결국 ‘누가 가르쳤느냐’를 묻는다. 내가 어제 그 자리에서 한 말은 단순했다. “더 신경 쓰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어 있던 감정과 생각들은 훨씬 복잡했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거울 속 얼굴이 어제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양치질을 하면서 일부러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거울을 향해 말했다.


“괜찮아. 오늘은 오늘 일만 하자.”


‘괜찮아’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에 가까웠다.
괜찮지 않더라도, 일단 그렇게 말해 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복도는 여전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교실로 우르르 뛰어가는 아이들. 그 사이를 지나가면서 나는 일부러 평소와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어제 숙제 했어?”
“졸리면 쉬는 시간에 눈 감고 있어도 돼.”


아이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그냥 손만 들어 보였다.
어제와 확실히 달라진 건 없는데, 내 쪽에서 보는 풍경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화면 밝기를 한 칸 낮춘 것처럼, 모든 것이 반 톤 정도 어두워진 느낌.


첫 시간은 H대 준비반이 아니었다. 초급반 회화 수업이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오며 “선생님, 오늘 게임해요?” 라고 외쳤다. 그 말에 입가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게임? 오늘은… 반만 해볼까.”


“에이, 전체 다요!”


버티는 힘은 이런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를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어른들이었지만,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결국 아이들이었으니까.


수업을 시작하고, 학생들이 짝을 지어 ‘어제 뭐 했어요?’를 서로 묻고 답하는 연습을 하는 동안, 내 머리는 슬쩍슬쩍 다른 데로 빠져나가려 했다. 오늘 교장과 나눌 이야기, 그리고 아마도 그 뒤에 이어질 학부모와의 2차 충돌 가능성. 하지만 입은 여전히 아이들의 문장을 잡아주는 데 바빴다.


“‘했어요’에서 연음 발음 ‘ㅆ’ 발음 좀 더 세게.”
“‘집에’ 아니고 ‘집에 가요’야, 끝까지 말해.”
“‘몰라요’라고 말하면 안 되는 상황도 있어.”


아이들이 그 말을 듣고 고쳐 말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교장실에 들어가 있을 수도 없고, 단톡방 글을 지워버릴 수도 없다. 대신, 눈앞에 서 있는 아이들 발음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 문장을 조금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다듬어주는 것.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나가고, H대 준비반 학생반 교실에 가기 전에 나는 빈 교실에 혼자 서 있었다. 창가 쪽으로 가서 밖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제기차기를 하고 있었다. 동그랗게 서서 서로에게 제기를 날린다.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도 헛발을 치게 된다. 그걸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보이지 않는 타이밍에 맞춰 발길질을 하고 있다.
학부모, 학교, 입시 제도, 유학원, 이런 것들이 아래를 향해 내려올 때,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 발길질을 하는 사람 처럼 수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어제 샤오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잘해줬다고 말하면, 엄마가 왜 너는 못하냐고 할까 봐.’
아이도, 나도, 다들 누구 눈을 먼저 보는지에 따라 말이 변하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H대 준비반 반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선생님, 들어가도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 다 왔어?”


“네.”


교실에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제보다 표정은 조금 더 굳어 있었지만,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금방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그게 어른으로서는 별 것 아닌 변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눈에는 충분히 큰 변화였다.


“오늘은…”
나는 칠판에 크게 네 글자를 썼다.


‘실전 모의면접’


“어제 얘기해 줬지? 오늘은 진짜 시험처럼 할 거야.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선생님이 무작위로 질문하고, 너희는 답하는 거.”


아이들 사이에 작은 긴장감이 돌았다.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한 긴장감.
나는 일부러 어깨를 한번 크게 으쓱하며 말했다.


“긴장 돼?”


“네에…”


“좋아. 그럼 잘 되고 있는 거야.”


밍루가 앉아 있는 자릴 슬쩍 보았다.
그녀는 아직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손가락은 펜을 잡은 채 천천히 노트를 긁고 있었다.


“누가 먼저 할래?”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가, 샤오위가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할게요.”


그게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한 번 물꼬를 트면, 그 다음은 훨씬 수월해진다.
나는 그에게 전공 질문 두 개, 인성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는 어눌하지만 분명하게 답했다. 문법은 틀렸지만, 전달은 충분히 됐다.


“좋아.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아이들이 하나 둘씩 앞으로 나와 제 몫을 채우는 동안, 내 마음 한쪽에서 제일 큰 무게를 차지했던 이름이 아직 불리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말했다.


“밍루, 할 수 있겠어?”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그 눈빛에는 두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기 싫다’와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그 중 후자가 조금 더 크기를 바랐다.


“선생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만… 쉬운 질문으로 해주면 안 돼요?”


나는 그 요청이
단지 ‘질문 난이도’에 대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제 집에서 있었을 대화를 상상해보았다.
“수업에서 뭐 했어?”
“몰라.”
“왜 몰라?”
“어려워.”
“선생님이 뭘 가르쳐 줬는데?”
“발음…”


그 작은 말들이 어떻게 단톡방에 도착했는지, 조심스럽게 이어보았다.


“그래.”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기초 질문 하나, 전공 질문 하나. 이렇게만 하자. 괜찮겠어?”


밍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교탁 앞에 서는 순간,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볼까?”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선명했다.
“저는… 밍루입니다. 저는 H대학교에… 어, 진학하고 싶습니다. 전공은…”


말이 그 지점에서 흔들렸다.
입술이 한 번 말라 붙었다.


“괜찮아.”
나는 조용히 말했다.
“숨 한 번 쉬고, 다시.”


그녀는 숨을 들이쉬고 다시 말했다.


“저는 H대학교에 진학하고 싶고, 전공은 관광 경영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한 문장 안에 필요한 요소는 모두 들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전공 질문 하나만 할게. 왜 다른 학교가 아니라 H대예요?”


밍루는 약간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 보았다가,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거기… 한국어 수업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 학생들이랑…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관광 쪽으로도… 실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들었어요.
그래서… 거기를 선택했습니다.”


문장 사이가 비어 있었지만, 그 사이가 오히려 진심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정도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 잘했어.”


밍루가 자리로 돌아갈 때, 다른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박수를 쳤다. 크게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박수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녀를 향한 응원, 나를 향한 미안함,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같이 넘어가야 할 벽에 대한 인식.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나가려는 순간, 반장이 문 앞에서 돌아섰다.


“선생님.”


“응?”


“오늘… 이거, 나중에 학부모들 모임 있을 때… 보여줘도 돼요?
우리가 어떻게 수업하는지.”


나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뭐를?”


“오늘 영상이요.”


반장이 자기 휴대폰을 들었다.
수업 내내, 마지막 줄에서 뭔가를 조용히 찍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저 노트 정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수업 일부를 촬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몰래 찍은 거야?”


내 말투가 살짝 까칠해졌을지도 모른다.
반장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선생님… 그… 지난 번에 엄마가 ‘정말 그 선생님이 그렇게 하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제가 보여주고 싶어서. 근데 선생님이 허락 안 하면 안 보여줄 거예요.”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촬영된 내 모습이 어떤지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에게 발음을 다시 시키고, 질문 던지고, 칭찬하고, 또 고쳐주고.
다른 특별한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제 화면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만 보여줘.”


결국 그 말을 하고 말았다.


“괜찮겠어요?”


“응.
내가 뭐 이상한 말 한 것도 아니고.”


반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저녁 엄마한테 보여줄게요.
선생님 수업 절대 가볍지 않다고, 제가 말할게요.”


그 말이, 어제 상담실에서 들었던 문장과 겹쳐졌다.


“왜 우리 아이는 모르죠?”


이번에는 반대로,
“우리 아이는 알고 있어요.”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점심시간, 교장실로 다시 불려갔다.
교무실 문을 나서며 동료 여선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쌤, 너무 기죽지 마요.
우리는 다 알아요. 쌤 수업하는 거.”


그 말이 등 뒤에서 가볍게 올라와 어깨를 한 번 토닥였다.


교장실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고 잠시 숨을 고르고 들어갔다.
교장은 서류를 정리하다가 나를 보았다.


“왔어요? 앉아요.”


나는 의자에 앉아 허리를 곧게 세웠다.
이번엔 어제처럼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상담 이후에요.”
교장이 말을 시작했다.
“그 학부모가 또 연락을 했어요.
수업 방식에 대해서 여전히 불만이 있다고.”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네, 들었습니다.”


“근데…”
교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다른 학부모 몇 명이 또 연락을 했어요.”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또?’ 라는 단어가, 이번엔 다른 의미이길 바랐다.


교장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쌤 수업이 가볍다고 했는데,
다른 학부모들은 정반대로 말하더라고요.”


잠깐 공기가 멈췄다.


“정반대로요?”


“응.
어떤 엄마는 ‘우리 아이가 발음이 많이 좋아졌다’,
또 어떤 아빠는 ‘진짜 면접 보는 것처럼 연습해줘서 고맙다’고 했어요.
그 반장이 수업 영상도 조금 보여줬다더군요.”


나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가, 천천히 들었다.


“그래서… 결론은요?”


교장은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결론은…
이 학교에 다양한 시각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조율하는 게 내 일이기도 하고.”


그 말은 뜻밖이었다.
나는 이미 ‘학교는 학부모 편을 들겠지’라고 마음속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교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태겸 선생.”


“네.”


“나는 쌤 수업을 지키고 싶어요.
쌤 스타일이 분명히 있고,
그게 아이들한테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순간, 목이 뜨거워졌다.


“근데 동시에,
민원도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안 하나 하려고요.”


“…어떤 건데요?”


그는 A4용지 한 장을 꺼내 내 쪽으로 밀었다.


“한 달 동안, 수업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서
주 1회 정도 학부모에게 전달해 주세요.
무슨 질문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 연습했는지,
숙제는 무엇이었는지.
그러면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못 하겠죠.”


나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노트에 메모하고 있던 것들을 조금만 정리하면 된다.


“그리고…”
교장이 말을 이었다.
“그 민원 넣은 학부모 있잖아요.
그 사람하고는 내가 한 번 더 얘기할게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같이 앉히진 않을게요.”


예상 못 했던 말이었다.


“왜요?”


“어제 많이 힘들었잖아요.
그 사람 스타일은…
한 번 방향 잡히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편이니까.
그건 내가 할 일이에요.”


그 말은 분명한 보호였다.


나는 순간, 어제 상담실에서 느꼈던 모든 무력감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교장은 손을 저었다.


“나도 선생님한테 부탁할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교육 철학… 이런 거 이야기하면 좀 거창해 보이지만,
쌤은 쌤 나름대로 확실히 그게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런 걸… 학부모는 눈으로 못 보잖아요.
아이 성적, 결과만 보니까.
그 사이에서, 쌤이 조금 다리를 놓아줬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랑은 이미 잘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에서 작은 탄식이 흘렀다.
지금까지 나는 아이들에게만 모든 걸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느끼고 변하면,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구조 속에서는, ‘아이들’과 ‘학부모’ 사이에 또 하나의 층이 있었다.
그건 서류, 기록, 정리, 그리고 설명이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 말이 나왔다.
그건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향한 말 같았다.


교장실에서 나오자 부장 선생이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살았습니다.”


그 말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뭐랬어요.
쌤 수업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한 달 동안 수업 내용 정리해서 보내야 된대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쌤 메모 잘하잖아.”


“메모는 하는데… 정리가 문제죠.”


농담처럼 말하고 교무실에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어깨에 올려져 있던 돌덩이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혼자 맞고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새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H대준비반_수업기록’


폴더 이름을 입력하는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이건 단순히 학교 행정 업무를 위한 파일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내 수업을 설명하는 언어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했다.


첫 파일을 열고, 오늘 수업 내용을 정리했다.


‘오늘 목표: 실전 모의면접 1회차
실제 질문 5개 사용, 학생별 1~2회 답변
장점: 학생들이 실제 긴장 상태에서 말하는 연습 경험
보완점: 답변 길이 확장 필요, 전공 관련 구체적인 예시 추가’


밍루에 대한 부분도 따로 적었다.


‘밍루: 자기소개와 전공 선택 이유 답변 가능.
문장 사이 공백은 크지만, 기본 구조는 이해하고 있음.
앞으로 개별 질문지 작성 후, 집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간단한 한국어·중국어 병기 계획.’


파일을 저장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리하는 문서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내가 뭘 하고 있는 사람인지” 다시 알려주는 기록 같았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리란이었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적었다.


“살짝… 살아남았어.”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사진 보내줘.”


“무슨 사진?”


“오늘 수업한 거. 노트든 판서든.
내가 제일 먼저 팬카페 할게.”


나는 그 말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팬카페’라는 단어가 이 상황에서 이렇게 가볍게 들릴 수 있다니.


책상 위에 얹어 둔 수업 노트 사진을 찍어서 보내자,
곧이어 하트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가 왔다.


“멋있네, 한국어 선생님.”


“학부모한테는 욕 먹었는데?”


“그래, 학부모는 손님이고
나는 가족이야.
가족이 더 위야.”


그 말은 조금 유치하게 들리면서도, 이상하게 그 어떤 전문적인 조언보다 더 힘이 있었다.
나는 답장을 길게 쓰지 않고, 딱 한 줄만 보냈다.


“나, 남아서 잘해볼게.”


그 문장은 어느새 대학교 제안을 거절할 때 했던 말과도 이어지는 말이 되어 있었다.
그때는 막연한 각오였다면,
지금은 조금 더 구체적인 방향을 가진 문장이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오늘 하루를 다시 떠올렸다.
밍루 엄마의 날카로운 말,
아이들의 조심스러운 태도,
반장이 보여준 휴대폰 속 영상,
교장의 제안,
그리고 리란의 메시지.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 동안 나를 찔러댄 말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를 감싸준 말들도 분명히 있었다.


“선생님이 잘해줬다고 말하면, 엄마가 왜 너는 못하냐고 할까 봐.”
“우리 아이가 발음 많이 좋아졌다.”
“나는 너 수업하는 거 봤잖아.”
“가족이 더 위야.”


가르친다는 일이 뭔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되는 날이었다.
시험 점수 하나로 평가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점수만으로는 절대 평가할 수 없는 시간들을 매일 쌓아 가는 일.
가끔은 억울하고,
가끔은 보람차고,
가끔은 도망치고 싶다가도,
결국 다음 날 칠판 앞에 다시 서게 만드는 이상한 직업.


눈을 감기 전에,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래.
오늘도 흔들렸지만,
그래도 아직,
여기 서 있을 수는 있겠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허용하는
최선의 상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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