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들

by leolee

어느 순간부터 나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연차를 세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은 횟수를 세는 쪽에 가까웠다.

말을 삼킨 날들, 그냥 넘긴 순간들,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던 횟수들. 그렇게 세어보니, 그 시간이 어느새 십 년을 훌쩍 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십이 년이었다. 칭다오에 와서, 이 학교에 몸을 담고, 같은 교실과 같은 책상, 같은 교무실 공기를 마시며 보낸 시간.


처음에는 비교하지 않았다. 아니, 비교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외국에 나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를 낮추고 있었고, 여기서 자리를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에서와 같은 기준을 들이대면 안 된다고, 여기는 중국이고, 나는 외국인이고, 그러니 조금 부족해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꽤 오랫동안 나를 보호해 주는 방패처럼 작동했다.


하지만 방패는 점점 얇아졌다.


월급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처음 계약했을 때의 금액에서 조금씩 조정은 있었지만, 그 조정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에서 같은 경력을 가진 교사가 받는 급여의 절반 수준. 정확히 계산해 보면 절반보다도 조금 못 미쳤다. 그래도 나는 크게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에게 이유를 붙였다. “여기는 생활비가 싸니까.” “비교하면 끝이 없다.” “나는 돈 벌려고 이 일 하는 건 아니잖아.”


그 말들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모른다.

문제는,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말들이 더 이상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내 생활은 점점 단순해졌다. 아니, 단순해졌다고 말하면 너무 좋게 들린다. 정확히 말하면, 선택지가 사라졌다. 여행은 꿈도 꾸지 않았고, 큰 지출은 늘 미뤄졌다. 옷을 사는 일도, 무언가를 배우는 일도 항상 “나중에”로 넘겼다. 주머니는 늘 비어 있었고, 통장 잔고는 다음 달 월급을 기준으로만 계산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학교에서의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났다.


가르치는 일만 한 게 아니었다.

학생들의 유학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소개서와 학습계획서를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탁이었다. “선생님, 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 “한국어 표현만 조금 다듬어주시면 돼요.”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말을 들으면, 더더욱 그랬다.


나는 그 문서들을 무료로 번역하고 수정했다.

중국어로 쓰인 자기소개서를 한국어로 옮기고, 어색한 표현을 고치고, 문단을 재구성했다. 어떤 학생의 학습계획서는 몇 번이나 다시 썼다. 전공 이해도가 부족한 부분은 내가 대신 공부해서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따로 수당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건 ‘선생님이 해주는 일’로 묶여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일이 너무 당연해졌다.

누군가는 서류를 들고 와서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갔다. 설명도 없이. “시간 될 때 봐주세요.” 그 말 뒤에는 늘 같은 전제가 붙어 있었다. 당신이 해줄 거라는 믿음. 아니, 기대. 그 기대를 깨는 순간, 나는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원어민 교사가 들어왔다.

한 달 정도 된 선생님이었다. 학교 시스템도 아직 잘 모르고, 학생들 이름도 헷갈려하는 상태. 그런데 급여 이야기가 우연히 흘러나왔다. 정확한 액수는 직접 들은 게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수준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의 두 배. 거의 정확히 두 배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 든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어이없음에 가까웠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십이 년을 여기서 보냈고, 그 사람은 한 달이었다. 나는 한국어 수업뿐 아니라, 시험 준비, 면접 지도, 서류 작업까지 하고 있었고, 그는 정해진 수업만 했다. 그런데 급여는 두 배였다.


물론 이유는 알고 있었다.

국적.

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워크퍼밋 조건도 달랐고, 급여 기준도 달랐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이 사회의 구조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와 납득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해는 했지만, 납득은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그동안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 게.


회의 자리에서 의견을 내도, 결정은 늘 위에서 내려왔다. 내가 제안한 방식이 채택되어도, 그건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학교의 시스템’이 되었다. 성과는 조직의 것이 되었고, 과정은 기록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개인의 선택이 되었고, 잘 되면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나는 가르치는 데에만 집중해 왔다.

돈을 벌기 위한 계산은 뒤로 미뤘고, 나 자신의 커리어 관리도 하지 않았다. 학생 하나하나를 붙잡고,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쌓일수록, 내 주머니는 더 비어갔다. 아이러니했다. 누군가의 미래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자부심과, 내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성실함의 문제일까, 아니면 구조의 문제일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K대학 합격 소식까지 겹쳐 들려왔다.

경쟁률이 유독 높다고 했던 곳, 모두가 쉽지 않다고 말하던 대학. 학생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떨렸고, 나는 다시 한번 축하를 했다. 두 번의 합격 소식이 연달아 찾아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들뜨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졌다. 마치 어떤 계산이 끝난 것처럼.


K대학에 합격한 학생의 부모도 D대학과는 별로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나는 그날 밤 혼자 앉아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십이 년.

머릿속에 구간 반복처럼 이어졌던

오르지 않는 월급, 한마디 해야 조금씩 오르는 구조,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기준. 학생들의 자기소개서와 학습계획서를 무료로 번역하고 수정하며, 이게 당연한 일처럼 굳어버린 풍경들. 그 모든 것 위에 오늘의 장면이 겹쳐졌다.


그제야 분명해졌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 까지라는 생각.

더 잘해도, 더 성과를 내도, 이 구조 안에서는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확신.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교무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잠시 앉아 있었다. 메일도 열지 않았고, 수업 준비도 하지 않았다. 대신 복도 끝에 있는 교장실 문을 바라봤다. 수없이 지나쳤던 문. 그날은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걸어 교장실 앞에 섰다. 잠시 숨을 고르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 똑.


그 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리를 내기까지, 나는 십이 년을 지나왔다.


들어오세요.


교장이 대답을 하였고 나는 조심스럽지만 그 첫 수업시간에 교실 문을 열었던 그때처럼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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