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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3. 뭇별

by 포레스트 강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詩人)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일부)

위 시는 윤동주(1917~1945)의 ’별 헤는 밤‘의 일부이다. 별은 우리에게 꿈과 추억을 안겨 준다. 시인 윤동주도 암울한 일제하에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어릴 적 추억을 더듬고 내일의 꿈을 꾸었다. 인간은 별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를 때에는 인류의 화복을 별의 운동과 연관하여 생각하였다. 이른바 점성술이다. 국가에서는 별을 관찰하는 기관과 시설을 운영하였다. 첨성대는 신라 시대에 별을 관찰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중요한 별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별의 운행에 대해서 나름대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밤새 하늘을 관측하는 사람이 별의 운행에 이상이 발견되면 반드시 윗사람에게 보고하였고, 실록 등에 기록으로 남겼다.

별을 지칭하는 순우리말이 몇 가지 있다. ‘샛별, 어둠별, 떠돌이별, 달별, 살별, 별똥별’과 같은 말들은 우리 나름의 발상과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샛별’인데 금성(金星)을 가리키는 말이다. 샛별은 동쪽 하늘에서 유달리 반짝반짝 빛나 사람의 시선을 끈다. 금성은 아침과 저녁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한다. 저녁에 비치는 금성은 ‘개밥바라기’, 또는 태백성(太白星)이라 하고, 새벽에 비치는 것은 ‘샛별’, 또는 계명성(啓明星)이라 한다. ‘샛별’은 ‘새(東)’와 ‘별(星)’이 합성어로 동방의 별이란 말이다. 금성이 이렇게 동방의 별을 의미하기에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라는 동요가 불리고 있다. 한자어로 금성의 ‘金’은 오행설에서 서쪽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발상과는 조금 다르다. 금성의 金자가 ‘쇠 금(金)’자이기에 ‘샛별’은 ‘새-별(東星)’ 아닌, ‘쇠-별(鐵星)’이 변한 말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리고 저녁녘의 금성을 ‘개밥바라기’라고도 하는데, 저녁밥이 기다려지는 때와 관련이 있다. ‘개밥바라기’는 개가 밥을 기다리는 시각에 금성이 떠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해석이 있다. 해가 진 뒤 저녁녘에 서쪽 하늘에 반짝이는 금성을 순우리말로 어둠별이라고도 불렀다.


‘떠돌이별’은 행성(行星)을 의미한다. 행성(planet)은 태양 주위를 공전(公轉)하는 천체이다. 행성이란 말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공전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행성은 유성(遊星), 또는 혹성(惑星)이라고도 한다. ‘떠돌이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떠돌아다닌다는 특성에 따른 이름이다. 그런데 한자어 ‘행성’의 ‘다닐 행(行)’자에 비하면 떠돌아다닌다는 말이 더 시적이다. 더구나 ‘떠돌이별’은 ‘항성(恒星)’을 ‘붙박이별’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릴 때 더욱 그러하다. ‘달별’은 위성(衛星)을 이른다. 위성은 행성의 인력에 의하여 그 행성을 도는 별로, 지구에 대한 달이 대표적이다.


‘살별’은 혜성(彗星)을 가리킨다. 혜성은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 ‘혜성’은 반점 또는 성운 모양으로 보이고, 때로는 태양의 반대쪽을 향하는 꼬리를 수반하는 태양계의 천체이다. ‘살별’이란 이 혜성의 꼬리에 초점을 맞춘 이름이다. 혜성의 ‘彗’ 자는 대나무 빗자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혜성의 움직이는 모양이 공중에 화살이 많이 떨어지는 모양과 같아서 그렇게 부른 것 같다. ‘별똥별’은 유성(遊星)을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유성은 우주에 떠 있던 물체가 대기권에 진입할 때 마찰로 인하여 빛을 내면서 떨어진다. 여름날 밤하늘에 한 줄기 섬광을 발하며 떨어지는 것을 ‘별똥별’이라 하였다. 별이 변을 보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땅 위에 떨어진 운석은 ‘별똥돌’이라고도 하였다.

서양에서도 오래전부터 별을 대상으로 점성술이 유행하였다. 서양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을 밝기 별로 묶어서 별자리라고 한 점이 흥미롭다. 별자리를 개인의 출생과 일생을 연관시켜서 생각하였다. 아울러 별의 운행이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기초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별의 관찰을 육안에만 의지하지 않고, 확대하여 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 한자어로 망원경(望遠鏡)은 먼 데를 볼 수 있는 안경이라는 뜻일 터인데 영어로는 먼 데라는 뜻의 tele와 범위, 영역이라는 뜻인 scope의 합성어이다.

별의 관찰 결과를 학문으로 발전시켜 천문학(astronomy)이 발달하면서 별들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다가 보니, 지구가 천체의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인다는 천동설이 깨지고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 heliocentric theory)이 태동하였다. 지동설의 처음 제창자는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로 인정되고 있다. 망원경에 의한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 금성(Venus), 지구(Earth), 화성(Mars), 목성, 토성(Jupiter) 등의 순으로 행성이 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운행 질서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독일의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이고 동시대에 이를 지지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이탈리아의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였다. 행성의 운행 질서 연구로 얻어진 결과 중의 하나가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이로 인하여 뉴턴의 고전 역학이 태동하게 되었고, 인류의 자연 현상 이해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 인간에게는 사유하는 특징이 있어 자연의 원리와 이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인류가 태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꽤 오래전에 깨달은 것 같다. 태양신 숭배 사상에서 쉽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생각이 생겨났고, 철학이나 종교가 생겨났다. 종교는 절대자를 숭배하고 있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인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아래의 시에서 보면 시인 김광섭(1906~1977)은 어느 저녁에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자신의 존재는 무엇일까‘라는 상념에 빠져 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다. 프랑스의 자연과학자요 철학자인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불어로 Je pense, donc je suis. 라틴어로 Cogito ergo sum. 우리의 생각하는 버릇이 오늘날의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였다. 인류의 지식이 많아지면서 사물에 대한 이치를 따져서 각종 학문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중에서 물질의 원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학문이 물리학이다. 한자로 물리(物理)는 ’사물(事物)의 이치(理致)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물리학은 원자 수준의 아주 작은 세계부터 우주라는 아주 큰 스케일의 세상까지 다루고 있다. 물리학은 자연 현상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도 해석을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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