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돌 물 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레스트 강 May 05. 2024

E10. 철원

 철원은 강원(특별자치) 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군(郡)이고 북쪽은 북한으로 휴전선(DMZ; Demilitarized Zone)이 지나간다.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으며 지금부터 천여 년 전에는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였다. 일제의 경원선 부설 이후 강원도의 주요 교통 거점이었으나 남북분단과 6.25 전쟁으로 크게 쇠락했다. 옛 경원선 월정리(月井里) 역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녹슨 철도와 기차는 남북분단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외에 옛 노동당사, 제2땅굴 등이 국가안보 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다.

    

 철원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넓은 평야 지대이다. 분지 지형으로 인하여 철원 지역은 현재 남한에서 일기예보 시간에 겨울에는 가장 추운 지역으로 여름에는 더운 지역으로 나온다. 철원평야는 국내에서 김제 평야와 함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단 둘 뿐인 육지라고 한다. 수십만 년 아마도 1억 년쯤 전에 북쪽의 평강(平康) 지대에서 용암(마그마)이 분출하여 이 지역으로 흘렀다고 추정된다. 용암은 철(Fe), 칼슘(Ca), 마그네슘(Mg) 성분이 많고 어두운 색깔을 띠는 염기성암인 현무암으로 이 지역에 있던 화강암 지역을 덮쳐 이 지역의 암석을 녹이고 흘러서 드넓은 평야 지대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동네 이름은 땅속에 쇳덩어리가 많다고 쇳벌, 즉 철원(鐵原)이 되었다. 지구의 내부가 수천 도에 이르는 철로 되어 있다는 가설과 일치하는데, 주위에 막상 이름난 철광산은 없다. 원(原)은 근원이란 뜻이다. 수원(水原)은 물의 근원이란 의미이다. 원(原)은 평원이란 뜻에서 볼 수 있듯이 평야란 의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천으로 물이 서쪽으로 흘러 암석층을 침식하여 임진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갔다. 그 결과 하천의 바닥이 평야 지대보다 낮은 형상을 갖게 하였다. 이 하천이 바로 한탄강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한탄(漢灘)이란 ‘큰 여울’이라는 뜻이다. 지역의 특성상 평야 지대에 있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바로 옆 하천의 물은 펌프로 퍼 올리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다. 결국 상류에 저수지를 형성하고 수로를 별도로 내서 물을 끌어와야 한다. 이렇게 생산된 이 지역의 쌀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유명한 오대쌀의 생산지로 쌀 생산에 비중을 두는 편이며 드넓은 철원평야에 논만 가득하다. 철원의 쌀은 DMZ에서 흘러온 물로 키웠다는 걸 강조한다. 철원군 대부분을 차지하는 용암대지의 특이하고 보존 가치가 높은 여러 곳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이 지형마다 안내판과 관람 보조 시설이 있는데 그 여러 곳을 합해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이라 부른다. 각 지정 지역은 철원군과 인접 포천시, 연천군에 걸쳐 있으며, 광활한 철원용암대지 위에 꽤 떨어져 있다. 한탄강 지역의 지질학적 특징은 현무암과 화강암이 모두 관찰된다는 점이다. 평야(논)와 하천 주위엔 독수리와 두루미 등이 찾아와 눈 덮인 논밭이나 얼어붙은 강가에 있는 두루미 무리가 상당히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굳이 두루미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도로변 논밭에서도 볼 수 있다.

     

 철원은 노동당사, 백마고지를 비롯한 전적지, 땅굴, 철도 중단점, 철원 옛 시가(市街)와 비무장지대 등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이 높으며 철원 용암대지와 한탄강, 비무장지대를 비롯하여 생태학적 가치가 높고 궁예도성과 고석정 등의 역사 유적이 있어 관광지로서의 가치와 발전 가능성이 높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철원군은 행정구역상 강원도지만 사실상 경기도 생활권이다. 철원군은 도청 소재지인 춘천시보다 경기도 연천군, 포천시, 의정부시 쪽에서의 접근이 훨씬 쉬운 편이다. 철원군청에서 춘천시청까지 75km 거리에 1시간 30분 전후로 소요되고, 원주시청까지는 무려 170km에 3시간이 소요되지만 철원군청에서 포천시청까지 30분, 의정부시청까지는 1시간 10분이면 갈 수 있다. 서울까지 고속도로 등이 잘 뚫려있어 포천시, 양주시를 거쳐 약 100km 정도로 1시간 30분이면 너끈히 들어올 수 있다. 주민들의 말씨도 경기 북부와 같고 강원도 영서 지역 방언과는 영 다르고 오히려 서울 지역 말씨에 가깝다. 철원에는 6.25 전쟁 이후에 이북에서 내려와 정착한 주민이 많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3대에서 4대 이상 거주한 이들이라서 나름 자신이 토박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포화가 멎었다. 그러나 전선이 움직이며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기는 약 9개월 정도이고,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한다고 2년 이상 소일하였다. 판문점의 서쪽 황해도 지역이 전쟁 전에는 남한 땅이었으나 지금은 연백평야가 북쪽의 땅이 되었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국지전이 있었는데 판문점 쪽에서 남쪽의 군인들이 결사적으로 방어하여 전쟁 전에 38선 이북이었던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철원평야가 대표적인 지역이다. 철원평야 대부분을 남쪽이 차지하여 북쪽이 얻은 부분은 원래 철원의 귀퉁이일 뿐이다. 북쪽에서는 철원평야 대부분을 잃음을 크게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농업용수로 쓰였던 큰 저수지가 북쪽에 있어서, 휴전 이후 남쪽에서 관개에 어려움을 겪다가 자체적으로 저수지를 2개 건설하여 용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철원 지역은 천여 년 전에 우리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 적이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궁예(弓裔, 869? ~ 918)이다, 그는 신라 시대 왕가의 서족(庶族) 출신으로 신라 말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스스로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神政的)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당시 송악(松嶽)의 해상 호족의 후예인 왕건(王建, 877~943)을 지지하는 호족들과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한다. 후고구려의 군주로 재위 기간은 901년~ 918년이다.

     

 903년부터 궁예는 수도를 송악에서 자신의 첫 거점이었던 철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철원 지역을 친히 돌면서 산세를 살피기도 하고, 905년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뒤에 세운 궁궐과 누대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졌으며, 연호도 성책(聖冊)이라고 하였다. 이 궁터는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으며, 옛날 궁예의 안방 옆으로 경원선 철로가 지나갔다고 한다. 906년에 궁예는 왕건을 보내 후백제의 견훤 군대와 여러 차례 치열하게 싸워 결국 크게 이겼다. 그 뒤에 후백제의 견훤과 나주 지역에서 격돌하였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라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 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소위 '관심법'이라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며 스스로 떠벌여 장군들과 문신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 918년, 궁예의 숙청에 위기의식을 가진 무장, 호족, 유학자 관료들이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다. 궁예는 철원의 궁궐이 있는 성(城)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하고, 왕건이 즉위하여 고려를 건국했다. 한동안 왕건에 반대하는 친궁예 세력들이 건재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 하기도 했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처음 옮겼을 때 눈에 보이는 돌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보고 왕조의 몰락을 직감했다는 설화가 있다. 백성들이 물러나라고 난리 치자 ‘한탄강 강가의 돌에 좀이 슬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다음날 득달같이 한탄강 주변에 가 봤더니 진짜로 돌에 좀이 슬어 있었고, 이것을 궁예에게 보여주며 물러나라고 하자 궁예가 ‘내 운수가 다했구나’라며 탄식하며 성을 버리고 나갔다는 이야기이다. 이 설화는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자연 지리적인 특징과 태봉의 역사가 결합된 사례이다. 철원에서는 이 현무암 돌을 종종 ‘곰보 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21세기에 이르러서 TV 연속극에서 궁예를 애꾸눈의 승려라는 외모로 묘사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중동 지역 성지순례 기행기에 갑자기 우리나라 철원의 역사와 지리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두 곳 모두 평평한 평야 지대보다 하천의 위치가 낮다는 점 때문이다. 한탄강 협곡은 수십 미터(m) 깊이이지만, 요단강 지역 협곡의 깊이는 수백 미터, 깊은 곳은 천 m가 넘는다. 모압 지방을 이루는 북쪽의 아르논강이나 남쪽의 세렛강도 테이블 형태의 고원지대로부터 그 깊이가 900m 정도 된다. 모압의 남쪽인 에돔 지방은 세렛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자연적으로 이 중동의 협곡이 이 지방을 지리적으로 고립시키게 되고 사회적으로 별도의 지방으로 성장하게 된다. 오늘날 관광버스로 그 협곡을 건너가더라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리게 된다. 이 지역에 최적의 경로인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가 고대부터 형성되어 있었고, 로마 시대에는 그 횡단 도로에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철원군은 한탄강의 절벽에 잔도를 설치하여 관광객이 걸으며 이 지역을 관찰하도록 하고 있다. 그 잔도의 이름이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이다. 주상절리길을 걷다 보면 기둥 모양으로 이루어진 암석 절벽을 만나게 된다. 주상절리(柱狀節理)란 기둥 형상으로 갈라진 틈이란 뜻으로 이 지역의 주상절리는 현무암질 용암이 땅 위를 흐르다가 용암의 표면이 굳어지게 되면서 균열이 생기게 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용암의 표면은 육각형이나 3~7 각형의 다각형 모양으로 갈라지게 된다. 냉각 과정이 지속되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틈이 땅속까지 연결된다. 이로써 기둥 모양의 바위들이 무수하게 많이 서 있는 모습이 된다. 그러나 하천을 흐르는 물에 의하여 장시간 동안 그 바위들이 침식되어 버려서 이 지역에서는 온전한 기둥 모양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 남해안이나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해안에 가면 온전한 모양의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상절리는 북아일랜드에 있는 '거인의 방죽길'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자이언트 코즈웨이(Giant’s Causeway)'이다. 오히려 한탄강 지역에는 수평판 모양으로 누운 수평절리(水平節理)가 유명하다. 위 사진은 어느 봄날 한탄강 주상절리길을 걸으면서 찍은 사진이다.


 철원의 관광 코스로 제2땅굴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50년 전에 북한 군인이 우리 남한 지역으로 땅굴을 판 것을 우리 군인이 발견하고 이를 안보 관광 코스로 개발하였다. 용암이 굳은 화강암 지역을 다이너마이트 폭약과 사람의 힘만으로 우리측 지하를 뚫고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 정도가 서서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이다. 당시에 남침의 목적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유사한 땅굴이 휴전선에서 적어도 세 개 더 발견되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볼 때 땅굴을 파는 것은 비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아니면 전술이 바뀌었던지 해서 지금은  더이상 이슈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땅굴을 터널이란 이름으로 편도 4차선까지 뚫고 있다. 기계를 셋팅해 놓으면 자동으로 바위나 흙을 깎아 차로를 만들어 놓는다. 지금부터 50년 전에는 땅굴을 탐지하고 발견하는 것이 큰 일이었지만 지금은 기술적으로 큰 진보가 있어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이제는 서울 도심 깊은 곳에 GTX를 건설하고 있다. 50년 전에 휴전선에서 땅굴을 팠던 사람이나 그것을 탐사하던 사람들은 지금은 죽었거나, 노인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E9. 마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