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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Jun 02. 2024

F0. 머리말

 흔히들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은 1947년 미국의 AT&T Bell Lab에서의 고체 트랜지스터(Solid-State Transistor) 발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후 1950년대의 게르마늄(Ge) 바이폴라(Bipolar) 소자, 실리콘(Si) MOS(Metal-Oxide-Semiconductor) 소자와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의 발명을 거쳐 1970년대의 메모리(Memory),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 소자에 이어 최근의 GPU(Graphic Processor Unit) 카드 개발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면서 반도체는 우리의 생활을 가히 혁명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혹자는 이 변화를 반도체 혁명(Semiconductor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에너지 활용 방법에 큰 변화를 가져와서 인류문명을 한 차원 높인 18세기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에 견주기도 한다.     


 기술의 혁신(Technological Innovation)은 큰 강에 비유될 수 있다. 심산에서 발원하는 작은 시냇물은 지류가 모여 큰 강물을 이루고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여기서 지류(支流)라고 함은 각종 발명과 과학적, 기술적 진보 등을 의미한다. 그간의 반도체 산업의 눈부신 발전에도 이 비유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고체 트랜지스터 하나의 발명으로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리, 화학, 전기공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 각종 과학과 공학의 진보가 이루어 낸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류들이 합쳐서 이루어 놓은 큰 강물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다. 새로운 산업이 태동하였고,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었고, 새로운 생산 방식이 도입되었으며, 새로운 조직이 형성되는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라디오, 전화기, 전자시계, 텔레비전(TV), 계산기,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 등의 기기가 변화를 거듭하고 요즈음은 휴대전화로 음성은 물론, 문자와 영상을 주고받는다. 무선통신의 발달은 우리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공장자동화 등 직장생활을 바꿔 놓았고, 국가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생활이 시공간적으로 단축되고, 그 발달의 속도는 더욱 가속되고 있다.

     

 큰 강물의 형성에 지대하게 영향을 주는 요소가 있는데, 이는 지형 조건이다. 산, 평야, 절벽 등 물줄기가 마주치는 지형의 조건에 따라 폭포가 되기도 하고, 멀리 물길이 돌아가기도 하고, 물줄기의 모양이 달라지고, 유속이 변할 수 있으며, 어떤 지류는 본류에 합류하지 못하고 다른 강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물이 바로 바다로 가지 못하고 호수에 흘러들어 거기서 오랜 시간 정체할 수도 있다. 기술 혁신에 있어서 이 같은 지형 조건은 다름이 아닌 까다로운 시장의 요구사항이다.

     

 경영학자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는 일찍이 ‘기업의 기본 기능은 마케팅과 혁신’이라고 갈파하였다. 따라서 마케팅의 주요 단계의 하나인 신제품 개발은 혁신과 함께 현대 기업의 기본 기능이며 양자 간에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제품은 혁신 없이는 개발할 수 없으며, 기업의 마케팅 대상은 곧 혁신 활동으로 개발된 제품이어야 한다는 뜻과도 같다. 결국 신제품의 개발은 전적으로 혁신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혁신을 ‘기술 혁신’의 좁은 뜻으로만 보려는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혁신(Innovation)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진 슘페터(Joseph A. Schumpeter, 1883~1950)는 혁신의 내용을 새로운 상품의 도입, 새로운 제조 방법의 도입, 새로운 시장의 개척, 새로운 원재료의 확보, 새로운 조직의 수행 등으로 구분한 바 있다. 따라서 혁신의 내용은 제품(Product) 혁신, 공정(Process) 혁신, 판매(Marketing) 혁신의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작은 규모의 혁신을 개선 활동이라고도 업계에서 표현하기도 한다.

     

 신제품이 혁신 활동으로 도출되는 것처럼 혁신은 직접적으로는 신제품의 아이디어에 의하여 창출된다고 볼 수 있다. 혁신은 신제품의 개발과 직결된다. 혁신은 아이디어의 산물이라는 뜻에서 혁신과 아이디어는 항상 상호보완적인 신제품 개발의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이디어의 개발이야말로 신제품 개발의 시발점이다. 이 경우 아이디어의 창출은 언제든지 시장 즉 고객의 필요 혹은 욕구와 관련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래야만 이른바 히트상품의 탄생이 가능하고 기업의 영속성이 담보된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제조 단계를 거쳐 상품화에 성공하기까지 즉 하나의 혁신으로 완성되기까지에는 그 상품에 대한 시장이 분명히 존재하여야 한다. 가능성 있는 혁신자 혹은 발명가가 자기의 혁신 혹은 발명에 대하여 시장의 잠재력을 따져보는 일련의 과정을 마켓 커플링(market coupling)이라고 부른다. 그 과정이 시장조사 또는 여론조사일 수 있고, 잠재 고객과의 구체적인 타협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마켓 커플링의 형태는 시도하고자 하는 혁신의 형태에 따라 다르게 된다. 마켓 커플링의 유형은 크게 마켓 풀(market-pull)과 발명 푸시(invention-push)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前者)는 혁신자가 시장의 필요를 인지하고 그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경우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새 제품이 발명으로 개발되거나 개량되어도 경제적 효용성의 관점에서 시장의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곧 죽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후자(後者)는 혁신자가 자기의 혁신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제품을 만드는 경우이다. 일견 무모해 보이지만 그 천재성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첫 고체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전자 즉 마켓 풀의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940년대에 전자 증폭기(electronic amplifier)와 스위치의 거대한 시장이 존재하였고 그 수요를 진공관(vacuum tube)이 충족시키고 있었다. 진공관은 부피가 크고, 파손되기 쉽고, 전력 소모가 많고, 수명이 짧고, 신뢰성이 낮고, 구동 전압이 높다는 여러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해결해 줄 신제품의 등장을 시장은 요구하고 있었다. 고체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후에도 거의 20여 년간 진공관은 맹위를 떨치며 사용되었다. 기술적인 진보가 시장의 요구를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추가적인 혁신 활동이 있고 나서야 오늘날과 같은 성공이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개별 혁신이 마켓 풀이냐, 발명 푸시냐를 두부모 자르듯 구분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반도체 혁신의 특이한 점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듯이 ‘발명의 정신’으로 무엇인가를 발명하겠다는 의욕만을 가지고는 성공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물리, 전기, 재료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있어야 혁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즉 과학적으로 훈련된 전문가에 의하여 혁신이 주도되었다. 전자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전자(電子)의 거동에 관련된 현상을 머리로 이해해야 했고, 재료의 순도와 형상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일반인으로서는 이해가 어렵고 한 가지 기술만을 알아서는 전체를 완성할 수 없었다.     

 혁신을 언급하면서 등장하는 고정메뉴는 각 혁신에는 반드시 중심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위대한 발명가 한두 사람이 중심인물이었으나 혁신의 내용이 복잡해지면서 팀플레이가 중요시되고 연구 그룹의 프로젝트 리더가 중심인물이 되어 왔다. 그 사람은 혁신에 참여하고 있는 조직에 활력과 동기화를 부여하며 어떤 난관도 인내심을 갖고 돌파하며 실패의 위험을 부담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중심인물이 점점 마케팅 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기술적인 훈련이 없는 사람도 뛰어난 마케팅 능력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다.

     

 이런 마케팅 능력과 반도체 사업에서 성패의 관계를 이 책에서 대표적인 유명 인사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고체 트랜지스터의 발명가로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사람인 쇼클리(William Shockley, 1910~1989)는 실리콘 밸리 형성에는 기여했지만, 게르마늄(Ge) 원소 반도체의 미래를 과대평가하고 실리콘(Si) 집적회로(IC)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부하직원들에게 배척당하고 사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노이스(Robert N. Noyce, 1927~1990)는 실리콘 MOS 소자와 집적회로의 아이디어가 향후 반도체 기술의 기본 추이가 되리라는 점을 간파하고 1968년 INTEL 회사를 설립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여 PC라는 거대한 시장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집적회로에 관하여 독립적인 특허를 인정받은 킬비(Jack Kilby, 1923~2005)는 2000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탔으나, 노이스는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에 선정되지 못하였다. 노이스의 INTEL 창립과 비슷한 시기에 AMD(Advanced Micro Devices)를 창업한 샌더스(W. Jeremiah Sanders Ⅲ, 1936~ )는 반도체 마케팅 능력으로 회사를 일구었고 지금까지도 회사가 건재하고 있다. 

    

 혁신의 근본적인 목표는 경제적인 성장이다. 제품 가격의 인하이든 효용가치의 증가이든 경제적인 이득이 있어야 그 혁신은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신에 이르기까지에는 재정적인 위험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 혁신이 실패하면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고 성장을 지연시킬 수 있다. 결국 경쟁자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조직의 붕괴로 이어진 경우도 많이 있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이 성장할수록 새로운 혁신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어느 조직이나 회사가 반도체 사업을 새로 착수하기 어려운 경향이 나타났다. 아울러 혁신의 성공에 따른 경제적인 이득을 독점하여 그 권리를 배타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대두된 것이 특허를 비롯한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문제이다. 주요 반도체 혁신의 언저리에는 반드시 특허 분쟁이 수반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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