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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Jul 24. 2024

F9. 한국의 출현

 미국과 일본이 ‘미일 반도체 협정’을 조인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일본 대신에 다크호스로 등장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미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의 성장을 인지하지 못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국제무대에 들어오면, 경쟁의 다각화라는 측면에서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한 듯하다. 원래 한국은 반도체 제조의 후공정(後工程)인 패키지 혹은 조립공정 분야에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반도체 조립공정은 기술적인 특기가 별로 없고 인건비의 비중이 높다는 이유로 1960년대의 미국의 반도체회사는 이 과정의 제조를 태평양 건너에 있는 한국,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등으로 이전하였다. 섬유산업에서 주로 쓰던 이 추세를 off-shore manufacturing이라고 부른다. 페어차일드, 시그네틱스 등의 미국 반도체회사는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국제공항이 가까운 서울의 서남부에 반도체 조립 생산 라인을 구축하였다.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이 회사들은 보수가 높았고 첨단기술을 다루므로 당연히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기술을 담당하던 엔지니어들이 한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에 주춧돌이 되었다. 이렇게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반도체 조립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 회사가 생겨났다. 아남(亞南) 반도체가 대표적인 예로서 서울의 성수동과 그 후에 경기도 부천시가 반도체 조립 산업의 메카가 되었다.

     

 당시 한국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진출을 모색하던 차에 제품이 크지는 않으나 전자 제품에 꼭 필요한 반도체 산업이 훌륭한 후보로 떠올랐다. 당시 일본의 성장을 지켜봐 온 한국의 큰 회사들은 일본 회사 경영진의 조언을 받아 반도체 칩을 제조하는 전공정(前工程)에 주목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미국 회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엔지니어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활용하여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대기업들이 반도체 산업 분야에 뛰어들게 되는데, 반도체 전공정부터 후공정까지를 포함하는 일관 라인을 구축하고 종합반도체회사를 표방하였다. 당시의 여건상 메모리 반도체 제조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이 반도체 산업의 육성에 도움이 되었다. 특히 전자공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였다. TV, VCR 등 영상기기뿐만 아니라 냉장고 에어컨 등의 백색 가전산업을 육성하여 반도체의 수요를 창조하였다. 유선전화 망을 전국적으로 깔기 위한 교환기 사업을 중심으로 한 통신 산업이 붐을 이루었고, 미국에서 불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를 제조하여 공급하는 일을 우리나라가 중추적으로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반도체 메모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웨이퍼 한 장에서 나오는 양품(良品) 반도체 소자(칩)의 숫자 비율로 표시되는 수율(yield)이 반도체회사의 경쟁력의 지표가 된다. 또한 이 경쟁력은 팹(fab)의 결함밀도(defect density)를 줄이는 일과 소자 크기의 축소로 실현된다. 자연히 더 큰 용량의 DRAM(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칩의 출시와 최소 선폭의 크기를 줄이는 경쟁에 불이 붙었다. 이런 소자의 축소화는 설계자동화와 제조공정의 발전으로 실현되고 지속적인 제조 장비의 도입과 연구 개발 비용의 투자가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 사업에 신규로 진출하려면 많은 자본이 필요하게 되어 진입 장벽이 아주 높아졌다. 메모리 반도체 칩의 구조와 작동 원리가 변천하면서 이를 기술적으로 추적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결국 삼성전자(Samsung Electronics)는 반도체 분야에서 성공하여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하였다. 하이닉스(Hynix) 반도체회사도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자본 구조의 변화를 겪으며 고군분투하여 세계 반도체 메모리 시장에서 생존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의 반도체 제조공정 분야가 활기를 띠면서 관련되는 장비와 소재 관련된 외국 회사들이 밀려왔다. 세월이 지나면서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국내의 부가가치 기여 요인이 적다는 지적과 함께 외국 회사들의 횡포로 자체적으로 장비와 소재의 개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엔지니어들의 실력도 향상되어 자체 장비와 소재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일본이 반도체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게 그들의 축소 지향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우리의 석학 이어령(李御寜, 1933~2022) 선생이 진단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뒤를 이어 반도체 강국이 된 데는 우리의 우수한 공간 인지력 덕분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가 반도체 분야에서 선전하는 동안에 스포츠 분야에서는 양궁이 세계를 제패하였고, 골프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이 운동들은 활이나 공을 바깥으로 힘껏 내갈기고 표적에 명중시키거나 정해진 타수(打數) 이내에서 홀에 공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 양궁의 경우 대표선수 선발 방법의 투명성과 골프의 경우 수입과 바로 연결되는 프로 근성을 성공의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분야의 선수들은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하여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이들은 본 대회 전에 대회가 열리는 곳을 가 보고 직접 연습 라운드를 경험한다. 이때 이들은 대회장의 지형지물을 익히고 바람의 방향이나 속도 등을 파악해 둔다. 본 대회에 임해서는 그들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작전을 펼친다. 선수들은 평소의 연습대로 골프채를 스윙하거나 화살을 당긴다. 선수들은 공이나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을 머리로 그리면서 몸이 거기에 맞게 자동으로 반응하여 아주 루틴(routine) 한 동작으로 공이나 화살을 밀어낸다. 눈과 머리와 손, 어깨 등 온몸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그날의 경기를 장악할 수 있다. 그때그때 바람 등의 기후조건에 맞춰서 손목이나 어깨를 조정하기도 하나, 이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그날의 경기를 망쳤다고 이야기하는 선수들의 말도 종종 듣는다. 주말 골퍼 같은 일반인 중에도 유난히 공간 인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종종 발견한다. 이들의 점수가 좋은 점은 차치하고, 이들은 동반자의 볼을 필드 내에서나 OB(out of bound)가 나도 유난히 잘 찾는다. 시력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공이 날아간 방향과 착지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사람이 끼어 있으면 담당 캐디는 그날 아주 마음고생이 심하다.

     

 자연계 연구자에게는 물체의 단면 구조를 보는 게 필요하다. 반도체 소자의 개발 과정에서 아무리 축소하더라도 배율이 좀 다를 뿐 기본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주어진 작은 공간 내에 단위 소자를 몇 개를 어떤 구조로 집어넣을 수 있는지 머리로 파악하는 능력이 우리나라 연구자들에게 출중하다. 단위 소자들을 이차원이 아닌 삼차원으로 배열하는 기술을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개발하여 특허로 등록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를 구현하는 공정 기술도 우리나라 기술자가 월등하다. 제조된 반도체 칩의 단면을 주사전자현미경(scanning electron microscope; SEM)으로 확대하여 관찰하는데, 우리 연구자들은 이 과정을 머리로 훤히 꿰뚫고 있다. 오늘날에는 FIB(Focused Ion Beam) 장비로 잘못된 구조의 반도체 칩을 수정하는 과정에 활용하는데, 우리 연구자들은 머리에 이 과정이 일대일(一對一)로 제대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기술(skill)이 의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우리나라 의사들의 실력이 세계적으로 일류이고 세계적인 명의가 탄생하고 있다. 우리 몸을 진단하는 의사나 임플란트를 이식하는 치과 의사는 SEM 등의 영상의학과 자료를 근간으로 신체의 구조와 병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장기를 머리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시술하니까 세계적으로 이름이 나게 된다.


 우리 민족이 공간인지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명량해전(鳴梁海戰)을 들 수 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진왜란을 맞은 이순신은 왜란 초기에 옥포대첩, 한산도대첩 등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조선의 수군 조직은 한양에서 남쪽을 내려다보아 오른쪽 즉 동쪽으로 지금의 부산 근처에 경상좌수영이 있고 거기서부터 남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서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이 있어서 남해안의 수비와 경계를 담당하였다. 사령부 격인 각 수영(水營)의 위치는 동쪽부터 차례로 대략 부산 수영구, 경남 통영(거제), 전남 여수, 전남 해남이었다. 서해안은 충청수영 담당이었는데, 그 수영은 지금의 오천이었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고 사람이 사는 고을이 모두 강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각 고을에 필요한 물자는 바다와 강을 오가는 조운(漕運)에 크게 의지하였다. 수도인 한양의 물자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한강을 통하여 배로 운반되었다. 그만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아우르는 삼도(三道)의 수군 통제권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됨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모두 관할하는 수군의 사령관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순신은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인 도원수 밑에 수군을 담당하는 차하위의 병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인 원균(元均, 1540~1597)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의 보고가 없자 선조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이순신에게 지시하였다. 조정의 지시와는 달리 이순신은 왜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선제공격을 신중하게 생각하였다. 결국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일부 신하의 만류로 사형은 면하고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권율의 사령부가 있는 경상남도 합천의 초계로 이동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조선 수군은 1597년 음력 7월 15일 경상남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해협인 칠천량(漆川梁)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자, 원균은 막다른 해협으로 함대를 몰아넣고, 함정을 스스로 불사르고, 육지로 병력을 내려 흩어지게 해 모두 학살당하게 한 자승자박(自繩自縛) 작전으로 크게 패전하였다. 원균 자신도 육지로 도망가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해전으로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왜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즉 정유재란이 시작된 전투이다. 이 패전으로 망연자실한 조선은 이순신을 7월 22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였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권율의 명령으로 경상 우도를 정리하고 진주에서 8월 3일에 임금의 교지를 직접 수령(受領)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구례, 곡성, 순천, 낙안, 보성, 장흥, 회령포 등으로 서쪽으로 이동하며, 9월 15일까지 전라 좌도를 정리하고 군졸들을 불러 모아 함대를 재규합하는 등 수군을 재건하였다.     

 왜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너무 뜻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돌아가 수비하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순신은 이 짧은 한 달여의 시간 동안에 경상 우도의 각 고을에서 서쪽 전라도로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물자를 옮겼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와해(瓦解)되어 사라졌고, 한산도 통제영도 스스로 태워 없앴음을 알게 되자 8월부터 대대적으로 서진하여 ‘전라도 공략전’에 나서게 된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한 뒤 권율의 육군 진영에 합류하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말로 반론을 제기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9월 들어서는 비와 바람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부이다. 서진한 왜군 수군은 9월 7일 벽파진 해전으로 추격하여 명량에 초라한 13척의 조선 수군과 마지막 보루인 전라우수영이 해남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왜군 수군은 9월 16일 보름의 물살을 따라 조선 수군의 마지막 보루인 명량 앞바다로 들어온다.

     

 이런 불리한 판세를 머리에 인식하고 있는 이순신 휘하의 장졸들은 9월 15일에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고 전투태세를 가다듬었다. 명량(鳴梁)은 우리말로 ‘울돌목’으로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물살이 빨라서 짐승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순신과 그의 참모들은 병선과 병졸의 열세를 이런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극복하고 왜군을 무찌를 작전을 짰다.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에 있는 해남의 전라우수영으로 옮기고 장수들을 불러 모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의 자세로 싸우기를 당부한다. 조선 수군은 900여 명, 노를 젓는 인원을 포함하면 대략 2,000여 명으로 추산되며, 함선은 판옥선 기준으로 총 13척이었다. 일본은 7,200여 명의 군졸들이 330척의 배를 갖고 있었는데, 133척의 배가 좁고 물살이 아주 빠른 울돌목에 들어왔다가 우왕좌왕하다가 30여 척이 조선 수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30배에 달하는 열세를 극복하고자 전투 시작 전에 적선(賊船)을 분산하도록 만들 목적으로 좁은 해역인 울돌목을 격전지로 선정한 이순신의 전술적 혜안이 돋보인다. 

    

 운명의 음력 9월 16일 아침 날씨는 맑았다. 수많은 왜선이 접근해 온다는 초병들의 보고가 들어오고 이에 이순신은 판옥선 13척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나섰다. 울돌목 앞바다에서 보잘것없는 조선 수군의 잔존 전력과 조우(遭遇)한 왜군함대는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자신하듯이 포위진을 짜고 돌격해 들어왔다. 이순신이 생각했던 유인섬멸전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은 돌격해 나아갔다. 왜군은 전투지의 지형적인 사정으로 큰 배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일제히 돌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이순신이 노린 대로였다. 전투 초반에는 조선 수군의 장졸들이 수수방관하다가 이순신의 호통과 회유로 전투에 참가하고, 울돌목의 물살도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이후 물살이 반대로 바뀌어 전황이 조선 수군 측에 크게 유리해졌고 왜선들이 역류를 맞으며 서로 엉키고 부딪치며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혼란에 빠진 왜 함대는 뒤로 돌려서 빠져나가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윽고 정오가 되어 물살의 방향이 바뀌게 되자 조선 수군의 전선(戰船)들이 일제히 왜선을 공격하여 조선 수군이 승기를 잡았다. 오후 1시경이 되자 완전히 조수가 바뀌어 물살이 역으로 빨라지면서 왜 함대는 공세 능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일부 지휘관이 전사함으로써 지휘통제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왜군은 제해권 확보 및 수륙병진으로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명량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 수군의 진격이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보급로 차단으로 왜 육군이 전면 후퇴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선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키고 해로를 차단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왜의 의도를 분쇄함으로써 정유재란을 끝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군함과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의 지략으로 백척간두의 나라를 지키게 되었다. 명량해전은 우리 민족의 공간인지 능력이 탁월함을 보여 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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