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은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환갑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산업은 인류의 산업구조를 크게 바꿔놓았고, 오늘날에는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생각의 세계까지도 획기적으로 새롭게 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제품의 수율이 관련 기업의 경쟁력의 지표인데, 보통 수율은 실리콘 웨이퍼 하나에서 나오는 칩의 전체 숫자와 양품 칩 숫자의 비율로 일정 기간에 걸쳐 제품별 평균치로 나타낸다. 이 수율은 웨이퍼 팹의 제조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팹의 결함밀도(defect density)의 감소와 칩 내의 트랜지스터 크기의 축소로 결정되고 있다. 한편 실리콘 웨이퍼 크기는 그 구경이 초기의 50mm에서 300mm로 커졌다. 반도체 산업은 회사 간에 지속적인 축소화 경쟁을 경험해 왔는데, 회로설계 자동화와 제조공정 기술의 발전으로 그것의 실현이 가능하였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제조 장비와 공정 기술의 개발과 투자가 필요하였다. 한때 반도체 산업의 학습곡선(learning curve)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반도체 칩의 제품 생산량이 두 배로 늘면 생산비용이 1/3로 감소한다고 믿어 왔다. 반도체 산업은 설비와 장비의 투자비가 매우 큰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그 결과 진입 장벽이 아주 높아 신규 회사가 이 사업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기술 세대에 맞는 반도체 제조 장비를 새롭게 개발하고 공급하는 회사가 미치는 영향이 아주 높다.
반도체 사업에는 사이클(cycle)이 있다. 각 제품의 세대별로 호황이 몇 년간 지속되다가 가격이 폭락하는 시기가 오게 된다. 옛날에는 통상 4~5년 주기로 불황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그 주기가 훨씬 당겨지고 있다. 보통 올림픽 대회가 개최되는 해가 호황기를 이룬다고 한다. 대표적인 호황기를 보면 1976년 오디오 붐, 1980년대의 VCR(Video Cassette Recorder) 및 OA(Office Automation) 붐, 1988년의 PC(Personal Computer) 붐, 1994년도의 멀티미디어(Multimedia) 붐, 1999년도의 Y2K와 통신 붐이 일어났다. 2000년대 들어서는 휴대전화, 게임기 붐 등이 반도체 경기 사이클을 선도하였다. 주기적 경기 변동의 원인으로 대략 4년마다 새로운 차세대 반도체 제품이 개발되고, 팹 건설이나 장비 투자도 4년 주기로 이행되고, 투자에서 양산까지 3~4년이 소요된다. 투자액이 커서 중간에 중단하기가 쉽지 않고, 여러 업체가 동시에 투자에 착수하나 선두 업체만이 제대로 투자금을 회수하고 나머지 업체는 시장에서 반도체 제품을 투매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일부 업체가 이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한민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렇게 반도체 산업이 발달하면서 업계는 심각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반도체의 재료부터 제품 기획과 개발에 이르는 모든 일을 한 회사가 담당하고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는데 이 과정의 일부를 처음에는 외주를 주다가 나중에는 중간제품으로 구입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반도체 제조에 들어가는 과정 대부분을 스스로 전담하는 회사를 종합반도체회사(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IDM)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의 한국이나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이 이런 형태로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여 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종합반도체회사는 비록 패키지 공정은 태평양 건너 아시아 지역으로 외주를 주더라고 반도체 집적 회로 제품의 기획과 설계와 실리콘 제조와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직접 간여하고 있다. 종합반도체회사는 필요한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IP)까지 직접 챙겨야 정통적인 반도체 사업을 영위한다고 업계에서 생각해 왔다. 초창기의 반도체 집적 회로를 제조하는 벤처회사들은 이러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초기에는 실리콘 웨이퍼의 성장과 준비까지도 종합반도체회사가 담당했으나 곧 전문적인 실리콘 웨이퍼 제조 회사가 생기면서 종합반도체회사는 실리콘 웨이퍼를 구매하여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반도체 회로를 직접 설계하고 그 정보를 마스크의 형태로 제작하여 실리콘 팹에 넘겨주었으나, 그 일은 전문적인 사내 마스크 숍(mask shop)이나 외부 마스크 제작업체가 담당하게 되었다. 반도체의 성능 향상으로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그 혜택을 반도체 업계가 보게 되었다. 즉 CAD(Computer Aided Design) 소프트웨어의 발달로 전자회로의 설계가 자동화되고 그 결과물인 데이터베이스(data base: DB)의 저장이 간단하게 가능하여졌다. 그렇게 됨으로써 설계 자동화 전문회사가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로 반도체 업계는 실리콘 집적 회로를 제작하는 공장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경쟁력 있는 반도체 회사라면 이런 시설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되는 줄로 알았다. 그 시설 이름이 일본 사람들은 한때 확산공장(擴散工場)이라 불렀고 영어권에서는 팹(FAB)이라고 불렀다. FAB이란 말은 영어 Fabrication의 준말이다. 설계 엔지니어는 자기가 설계하는 반도체 집적 회로를 생산할 팹이 가지고 있는 공정 능력에 맞게 설계하고 그 결과물을 마스크 혹은 레티클의 형태로 제공하고 팹의 소자 엔지니어(Device Engineer)와 긴밀하게 연락하면 되었다. 공정 엔지니어(Process Engineer)는 팹의 공정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에 전념하면 되었다. 공정 능력의 향상을 위해서는 공정의 자동화가 큰일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리콘 집적 회로의 제작을 위해서 전문 제조 장치가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반도체 제조용 장치의 제작은 FAB의 공정 엔지니어의 필요로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조용 장치의 외주화가 이루어졌고 전문 장치 제작회사가 생겨났다. 이러한 장치 전문회사의 출현은 FAB에 필요한 재료의 외주화가 촉진하였다. 오늘날 유명한 제조 장치 제작회사의 이름에 M이 있는데 재료를 의미하는 Material을 회사 창립 초창기에 사명의 일부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전문 제작회사의 출현으로 제조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장비 가격이 상승하고 공정 엔지니어의 소속이 기존의 FAB에서 이들 제작회사로 바뀌게 되었다.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러한 팹을 건설하고 필요한 제조 장치를 갖추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다. 반도체 팹에 전문적으로 재료나 제조 장치를 공급하는 회사들이 SEMI(Semiconductor Equipment and Materials Industry)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실리콘밸리가 있는 미국의 서부와 동부, 남부에서 SEMICON이라는 전시회를 열어 반도체 산업의 발전 동향을 기술자와 일반인들에게 소개하여 오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유럽 지역은 물론 일본, 한국, 중국 지역으로 전파됨에 따라 이 전시회도 현지에서 각각 열리고 있다.
이렇게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가 바뀌니까 하나의 새로운 팹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에 큰 부담이 생겼다. 미국의 큰 회사들이 팹 없이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회사를 팹리스 회사(Fabless Company)라고 부른다. 이러한 반도체 업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움직인 회사가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이다. 50여 년 전 당시 미국의 한 종합반도체회사에서 기술을 총괄하던 TSMC의 창업자는 대만으로 돌아와서 파운드리(Foundry) 전문회사를 설립하였다. 원래 foundry는 ‘주조’라는 금속 분야의 제조 용어이다. 기계나 생활용품 제작자가 제품 디자인과 기술 사양만 제공하면 금속 제조업자가 알아서 제품을 제조하여 납품한다. 이같이 첨단의 반도체 집적 회로의 제조도 제품 설계 엔지니어가 공장의 소자 엔지니어와 기술 회의를 통하여 공정 기술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마스크를 제작하여 제공하면 원하는 집적 회로 제품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반도체 제조 기술이 별거 아니라는 의미로 foundry라는 말을 썼다. 반도체 칩 위탁 제조라는 의미인데 우리말로는 그냥 파운드리라고 부른다. 새로 반도체 집적 회로 제품을 기획하는 회사는 자금이 없으니까 팹리스 회사로 시작하고, 기존에 팹을 가지고 있던 종합반도체회사도 새로운 세대의 집적 회로를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소요되어 어쩔 수 없이 팹리스 회사가 되어 갔다. 실리콘밸리 초창기에 설립되고 CPU(Computer Processing Unit) 칩의 개발과 생산 및 판매로 인텔과 경쟁하던 AMD(Advanced Micro Devices)의 창업자이자 CEO였던 제리 샌더스(W. Jeremiah Sanders Ⅲ, 1936~ )는 AMD가 fabless 회사가 되기를 선언하고 가지고 있던 집적 회로 제조시설 매각에 중동의 갑부를 끌어들이기 위해 언론에 ‘진짜 사나이는 팹을 가지고 있다(Real men have fabs)’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결국 중동의 갑부는 그 시설들을 인수하여 Global Foundries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새로운 공정 기술을 개발하고 수주 영업을 벌였으나 TSMC나 삼성전자 등 아시아 지역의 다른 파운드리 회사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샌더스의 이런 모순된 언행에 대하여 뒤에 AMD의 CEO가 된 리사 수(Lisa Su, 1969~ )가 여성임을 빗대어 후세의 호사가들은 ‘진짜 여성은 팹이 필요하지 않다(Real women don’t need fabs!)‘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이나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제품의 설계부터 팹, 테스트, 패키지 등을 모두 실행하는 명실상부한 종합반도체회사(IDM)이다. 미국의 회사 중에서 인텔과 마이크론 등이 종합반도체회사로 남아 있으나 최근에 인텔이 이를 포기하는 것을 검토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1970년대까지는 세계 반도체 매출을 초창기의 미국 종합반도체회사들이 주도하였다. 1980년대에 일본의 회사들이 메모리 반도체 제품을 앞세워 세계 반도체 매출을 선도하였으나 미일 반도체 분쟁으로 일본이 탈락하고 메모리 반도체 제품의 제조와 매출을 대한민국이 주도하였다. 메모리 시장의 생태계가 바뀌면서 낸드 플래시 메모리 등 저가의 새로운 메모리 반도체 제품이 출현하였다. 메모리 제품에서 철수한 미국의 벤처 기업이었던 인텔은 CPU(Central Processing Unit) 시장에 전념하여 새로운 PC(Personal Computer) 시장과 휴대전화 시장의 팽창을 선도하여 세계 반도체 매출 1위 기업으로 한동안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게임시장을 필두로 컴퓨터와 휴대전화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큰 메모리 용량에 연산속도가 중요한 GPU(Graphics Process Unit)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텔이 밀리고 새롭게 AMD와 NVIDIA 등 팹리스 회사들이 득세하였다. 일개 팹리스 회사들 제품의 팹 제조 비용의 액수는 크지 않더라도, 많은 팹리스 회사로부터 위탁을 받은 TSMC의 반도체 매출이 세계 1위를 넘보고 있다. TSMC는 팹리스 회사의 담당 엔지니어들에게 당신의 제품 디자인에 관심이 없다고 안심시키고 자기의 소자 엔지니어와의 기술 미팅을 중요시하며 제때제때 기술적 난관을 해결해 주어서 이들 회사로부터 많은 반도체 제조 물량을 수주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파운드리 사업마저 영위하려는 삼성전자와 같은 일부 종합반도체회사의 파운드리 매출량을 능가할 수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이 메모리 관련 설계 기술이나 제조 기술이 우수해도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는 취약하다는 지적에 일부 종합반도체회사에서는 비메모리 분야 반도체 개발에 노력하여 일부 성공하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시스템 반도체 혹은 시스템 집적 회로(System IC)이다. 하나의 System IC 안에는 메모리, I/O(Input/Output), 커스텀 로직(Custom Logic), 응용 마이크로프로세서(Application Microprocessor), 디지털 신호처리(Digital Signal Processor: DSP), 디지털-아날로그 혼합 신호처리 등 여러 가지 기능이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는 팹에서 필요한 제조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필요한 설계 기구(tool)가 자체적으로 육성되어 있거나 외부로부터 도입하여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또한 필요한 지적재산권(IP)을 다른 회사에서 도입하고 필요한 내장 소프트웨어(embedded software)를 개발하여야 한다.
빠른 연산속도를 위해 GPU 업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HBM(High Bandwidth Memory) 반도체를 개발하였다. HBM은 데이터가 오고 가는 대역의 폭이 커서 연산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메모리 반도체 칩을 적층하여 통신하도록 하는 구조로 패키지 기술과 팹 기술의 융합으로 HBM의 구현이 가능하다. GPU를 중심으로 HBM을 PCB(Printed Circuit Board)에 배열함으로써 해당 카드의 연산속도를 빠르게 한다. 결국 HBM의 개발은 패키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종합반도체회사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 회사로부터 반도체 패키지 제조의 수탁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웨이퍼 팹이 반도체 제조의 중심이 되어도 패키지 담당 조직을 끝까지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기술자를 양성한 회사가 장점을 가지고 HBM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게임기 물량이 적어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으나 최근에는 생성형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의 발전으로 인하여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팹리스를 넘어 칩리스(Chipless) 회사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반도체 칩을 직접 설계하거나 제조하지 않고 필요한 특허 등 기술에 관한 지적재산권(IP)을 허여하는 대가로 수입을 올리는 사업 모델을 말한다. 회사의 매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익성은 꽤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세월이 지나면서 반도체 산업의 구조가 변화하고,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런 생태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가치 사슬(value chain) 혹은 세계적인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바야흐로 반도체 산업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였다. 반도체 기술을 앞세운 중국의 거센 경제적인 도전에 직면하여 반도체 산업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관련 제조업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던 관례를 깨고 다시 미국 국내로 불러들이는 관계 법령을 만들고 이에 호응하는 동맹국의 회사들에 보조금을 부여하는 등의 정책을 쓰면서 새로운 세계 패권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