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라는 이름의 채찍을 내려놓는 일
마음의 울타리를 세우고 타인의 침범을 막아냈는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불안한 이유는 뭘까? 밖에서 들려오던 비난의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정작 내 안에서 나를 향해 "너는 아직 부족해", "이것보단 더 완벽해야 해"라고 외치는 엄격한 감독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편들에서 우리는 타인의 조연으로 살며 거절의 공포와 수치심을 견뎌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박힌 가장 깊은 상처는 '조건부 자아'이다. 무언가를 잘해내거나 타인을 만족시켜야만 가치 있다는 그 믿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채찍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는 '충분히 좋은 나' 와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결함'이 곧 '버려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오래된 공포 때문이다.
'이상적인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절벽 :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나의 성취나 쓸모에만 반응했다면 아이는 자신을 '완벽한 나'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서툴고 실수하는 자신의 모습은 수치심의 대상이 되어 숨겨야 할 '오점'이 된다. 내가 나 스스로를 거부하고 있으니, 남이 아무리 위로해도 그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이다.
수치심이 만든 '결핍의 렌즈' : 6화에서 다룬 수치심은 우리 눈에 '결핍의 렌즈'를 끼운다. 잘해낸 99가지보다 부족한 1가지만을 크게 보게 만드는 렌즈 말이다. 이 렌즈를 끼고 있는 한, 당신은 영원히 자신을 '수용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게 된다. 수용은 결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점 또한 나의 일부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할 때, 나는 비로소 변화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몰아세울 때는 방어하기 급급해 변화할 여유가 없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아"라고 안심시켜줄 때 비로소 우리는 건강한 성장을 시작한다. 수용은 포기가 아니라 나라는 씨앗이 어떤 꽃을 피울지 믿고 기다려주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형태이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완벽한 어머니'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어머니'가 아이를 건강하게 키운다고 말했다.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실수를 바로잡고 나의 결점을 바꿔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 게으르고, 때로는 흔들리며, 거절 앞에서 여전히 가슴 떨리는 그 모습 그대로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이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기능'이나 '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를 몰아세우던 엄격한 시선을 거두고, 나에게 가장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연습을 시작해 보자.
애썼다는 말 한마디 :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버텨낸 자신에게 "참 애썼다"고 말해주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도 괜찮다. 오늘을 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취약함을 허락하기 : "무서워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라고 나의 연약한 감정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자. 감정은 억누를 때 괴물이 되지만, 알아줄 때 비로소 평온해진다.
작은 기쁨을 선물하기 :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를 나에게 선물해 보자. 그것이 나를 수용하는 가장 실질적인 첫걸음이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라는 고유한 원본으로 존재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합격선에 나를 맞추려 애쓰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자신 스스로를 '충분히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짜 주연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울타리를 세운 당신의 영토 안에, 이제는 비난의 말 대신 다정한 환대라는 꽃을 심어보자. 당신은 이미 있는 그대로 충분히 좋은 사람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