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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트 Mar 12. 2021

새로운 생각은 변방에서 온다.

마이너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Taking Over the Asylum>

*드라마 'Taking over the Asylum'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두 달 후 나의 상사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목숨줄이 위태로운 인턴인 나는 그의 두툼한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트 씨는... 정말 마이너 중의 마이너구나. 생각보다 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예상치 못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대중적이지 않은 나의 취향이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이너’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메인 스트림 중의 메인을 추구하는 드라마 기획사에 PD로 지원한 내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채용 전환형 인턴 기회까지 부여받아 일을 시작한 지 3일 차, 나를 정식 직원을 만들어줄지 아닐지 재어보며 나의 성격과 취향을 관찰하는 이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공감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상사’가 말한 나의 속성, ‘마이너 중의 마이너.’ 대번에 반발심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단어 선택이었지만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자타공인 마이너다.


나는 드라마화할 수 있는 웹툰이나 소설, 해외 드라마를 찾아가 ‘어쩌면 상사’에게 보여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평소 좋아하던 작품을 뒤적이던 나는 1994년도에 만들어진 스코틀랜드의 드라마 'Taking over the Asylum', 번역하자면 '정신병원을 정복하라'를 찾아서 가져갔다. 켄 스콧과 <닥터 후>로 영미권에서 유명한 데이비드 테넌트의 버디 드라마. 그리고 결과는, 위에서처럼 극강의 마이너라는 평이었다.


누끼도 제대로 따지지 않은 이 촌스러운 포스터를 보시라. 어찌 마이너가 아닐 수 있겠나!

사실 나는 마이너라는 이 평가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더 마이너한 작품들도 꽤 알았지만, 정말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하고 좋은 사람들이 꿈을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드라마 속 에디는 방송국에 입사해서 라디오 디제이가 되고 싶지만 번번이 낙방하고, 원치 않는 영업 사원 일을 하는, 소위 사회가 말하는 '루저'다. 라디오 디제이가 꿈인 에디는 아마추어로라도 디제이가 하고 싶어 정신병원 치료 프로그램의 하나로 만들어진 라디오 스테이션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조울증 캠벨과 친구가 되는데, 어린 나이에 정신병원에 와 꿈도 없이 방황하는 캠벨 또한 사회가 말하는 '루저'다. 그 외 다른 정신병 환자들 또한 루저다. 그러나 그들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딘가 찌질하고 실패하지만 결국 가끔 기분 좋은 일들로 웃는, 내 이득을 위해 남을 해치는 것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보편적이라 생각했다. 내가 보는 나는 이들과 비슷했고, 바쁘고 경쟁적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이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루저, 마이너, 나는 이쪽 편에, 그리고 대중적이고 위너이며 메이저는 강 건너편에.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는 독특하거나 어렵지 않다. 야구선수였던 주인공이 폭행당할 뻔한 동생을 보호하려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감빵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함께 경험하고 부대끼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처럼 주인공과 여러 새로운 인물이 만나게 되는 형식의 드라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의 형식에서도, 약간은 시트콤 같이 웃긴 장면들이 있는 드라마 장르로서도, 'Taking over the Asylum'이 대중성의 측면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 여겼다.


어쩌면 나의 글이 작품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을 수 있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봤었던 나는 미친듯한 웹서핑을 통해 한국어 자막을 구해내어 몇몇 '어쩌면 상사'들에게 내밀었다.




*드라마 내용 스포주의


기대와는 달리 결과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어디가 마이너한 것인가요?"

"스스로 말해봐. 정말 모르겠니?"

"...해피엔딩이 아닌 거요?"

"그것도 그렇고."


에디는 꿈을 찾아 분투하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을 이루지 못한다.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한 치료 프로그램은 폐지 위기에 처하고, 에디와 캠벨, 그리고 친구가 된 환자들은 라디오 스테이션을 점거한다. 사회가 보기에는 '위험한 정신병자들의 점거'가 분명한 상황. 경찰이 들이닥친다. 당연하고 현실적이게도, 에디와 캠벨은 라디오 스테이션을 잃는다. 무장경찰 앞에서 중년 남녀와 정신병 환자들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건장한 청년들일지라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폭력을 동반한 공권력을 이길 수 없다.


에디는 라디오 디제이도 계속하지 못하고, 그나마 있던 직장에서는 병원 점거 때문에 잘리고, 하나 있던 가족인 할머니도 떠나간다. 그러나 슬픈 엔딩 속에서도 에디는 자신이 원하는 꿈을 좇아봤기 때문에, 돈보다는 친구와 꿈을 선택해봤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하고 슬퍼하지만 체념은 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 좋았다. ‘Taking over the Asylum’은 누군가는 슬프게 되었지만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는 것을 씁쓸하게 말하고 있다. 이야기 속 해피엔딩은 마음 편하지만, 해피엔딩이 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삶은 마음 편하지 않다. 엔딩 없이 지속되는 삶. 그걸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Taking over the Asylum의 마지막 장면. 세상에나, 화질도 안 좋을 정도로 옛날 드라마다.



그러나 나만 그게 좋았나 보다. '어쩌면상사'는 그 드라마의 모든 것이 마이너하고, 대중이 즐길만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확히 그가 어느 측면에서 ‘마이너’와 ‘대중’이라는 단어를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서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요새 누가 꿈을 찾을까, 싶어. 꿈이라는 단어가 너무 올드해. 요즘 시대에 꿈을 찾는다, 하면 피곤해. 꿈 같은 거창한 것을 위해 분투하라고 하면 꼰대 같애. 그냥 집 가서 빨리 쉬고 싶어 하지. 그리고 정신병 같은 소재는 어둡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정신병에 편견이 많아서 드라마로는 고민의 여지가 있지."


내 입장에서는 어쩌면상사가 꼰대 포지션이지만, 사실 내가 꼰대인 것일지도 모른다. '' 이라니. 나는 그 꿈이 굳이 거창하게 위인이 되거나 세계 최고의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편안하게 식사하는 것, 취미 생활로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 것, 퇴근 후 원하는 글을 써서 독립출판을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항변했으나 마음속 깊숙이는 그래도 사람들은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리진 않았다. 그는 상냥한 사람이었고, 분명 트렌디한 드라마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는 그의 말들이 옳았다. 다만 고집스러운 나는 나도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집에 빨리 가서 쉬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지라도, 그 사람들이 충분히 쉴 시간을 가진다면, 그들은 분명 '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를 이루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꿈을 잃거나 꿈을 이루라고 말하는 사회에 지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꿈을 꿀 시간, 체력, 여유를 모두 앗아간 세상에 지쳤다는 것이 더욱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대중적인 이야기들을 영 모르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장장 이십 년 동안 유명한 웹툰을 섭렵했었고, 대중 상업 영화도 좋아한다. '어서오세요 305호에', '연민의 굴레', '아쿠아맨', '내 ID는 강남미인', 그리고 '의형제', '곡성', '변호인', '부산행', '도둑들' 등등. 그럼에도 특히 그 드라마를 드라마화하고 싶다고 가져간 까닭은, ‘어찌 되었건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는 투의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지금 상황이 싫기 때문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쯤의 절대적인 힘이 개입해서 극에 등장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개연성이 빈약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만이 있는 곳은 실망스럽다. 착한 재벌이 등장해 모든 일을 해결해준다거나 하는. 현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기득권과 권력자들이 윤허하여 하사하시는 자본의 힘, 젠더의 힘, 터무니없는 설정의 힘이기 때문에 몇몇 작품 정도는 저항적이고, 소소하고, 결국 겉으로는 졌지만 속으로는 지지 않으면 좋지 않겠는가. 자본주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품은 이야기들은 부당한 체제를 재생산해내고 그 재생산을 스토리와 화려한 화면으로 가릴 뿐이다.



물론 내가 '어쩌면상사'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 운운하진 않았다. 단순하게, 행복회로 돌리는 이야기들 말고, 다른 이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게 더 부적절했을 수도 있겠다고 지금 와서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그는 쐐기를 박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는 어딘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정식 직원이 되기 힘들 것이라고. 그는 물었다.


“정말 PD가 되고 싶은 거 맞아?”



한참을 그의 말을 곱씹었다. 정식 직원이 되려는 사람은 진심으로 대중적인 이야기를 좋아해야 했다. 그가 말하는 종류의 대중성이 진짜 대중성이라면. 하지만 그것은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나는 기획 PD로 지원한 것이지, 연기자로 지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즐기고 좋아하는 척, 연기를 할 수는 없었다.


“... 이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요.”


간신히 짜낸 답변은 정말이지 내 생각에도 정식 직원이 되려면 부적절한 답변이었다. PD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는 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내 답변에 대해 이불을 찰 시간조차 내줄 수 없었다. 그 시간에 나는 ‘왜 그가 말하는 <마이너한 것>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으로 취급되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과 이익의 추구가 일순위이겠으나, 적어도 다른 회사들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 콘텐츠 회사에서 마이너가 배척 대상이라는 것은 나에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마이너’는 우리나라와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소외를 넘어서 배척당하기 쉽다. 이상한 것, 독특한 것, 신기하지만 좋지는 않은 것. 그러나 새로운 생각은 가장 변방에서 온다. 터무니없는 상상들에서 온다. ‘Main STREAM’이라고 일컬어지는 주류는 결국 흐름이다. 지금의 중심이 멀어지며 새로운 물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주류가 될 가능성이 없어도 주류에 끊임없이 흘러갈 물을 넣어주는 신선한 샘물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변방의 것들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다. 지금까지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한 영화, 노래, 소설, 드라마들에 대해 쓰려고 한다. 물론 이미 마이너를 좋아하는 사람들, 매니아 중의 매니아들이 보기에는 내가 마이너하다고 칭하는 것들이 충분히 마이너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마이너 중 주류를 좋아하기 때문. 그럼에도 완전한 메이저가 아닌 것들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조금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 수가 있을까? 나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주눅 들고, 괴롭고, 외로울까?마이너에게는 변방을 넉넉히 품어안는 힘이 있다. 그 힘을 샅샅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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