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낡은 공책이 한 권 있다. 고 3 때 담임 선생님, 오성근 선생님이 수업이나 조례, 종례 때 해 준 말씀을 받아 적은 공책이다. 나는 이 공책을 시간이 날 적마다 가끔씩 꺼내 본다. 오늘 공책을 펼치다 눈에 닿은 문장이 어느 때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 우리가 새벽길을 걸어 온 이유는 장터에 오기 위함이 아니라 샘터에 찾아오기 위함인 것을. 침묵과 지혜와 근면을 길어내기 위해 가장 깊이 두레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1984년 3월 12일 월요일)”
고 3 시절 나는 입시의 중압감에 눌려 지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 말씀은 현실을 견뎌내는 힘을 주었다. 나는 선생님 말씀이 흩날려 사라져 버릴 까봐 틈틈이 공책에 붙잡아 적었다.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으리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우리 선생님과 맺은 인연의 실타래를 어디부터 풀어내야 할까?
선생님이 처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때가 생각난다. 누가 우리 담임선생님이 될까 기대에 차서 기다리던 우리는 선생님을 보면서 기뻐했다. 40대 후반의 선생님은 영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영어 수업을 매끄럽게 이끌기로 유명하였다. 다정다감해서 친근한 아빠 같은 분으로 선배 언니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희곡으로 등단하시고 시집까지 출간한 시인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니 우리가 기뻐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들떠 있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선생님 말씀을 적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새 공책을 꺼내어 선생님 말씀을 적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현명한 일이었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내 공책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여러 말을 하더라도 몇 줄로 함축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도록 해요. 일어난다는 의미는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쥐는 시간이지요. 이제부터 일어나서 기상 시간을 기입하도록 해요. 그것을 이행하고 이행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굉장할 거예요. 이런 좋은 습관을 갖도록 해요. 오늘은 입학식이었지요. 여러분은 이 중요한 의식을 이미 거쳤고 졸업식만 남았어요. 선생인 나는 처음으로 교단에 서는 신선함으로 시작하겠으니 여러분도 처음 시작하는 마음을 갖기 바라요.”
그때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이 참 신선하게 들렸다. 참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기록되는 것만이 살아있고, 살아 있는 것만이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이 말은 맞다. 그날 선생님의 첫 인사가 현재의 나를 일깨우고 있으니 말이다
첫 날부터 나를 사로잡은 선생님인지라, 나는 계산 빠르게 꼭 학급 임원이 되어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 의외로 그 희망은 쉽게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반장을 기피하는 고3의 현실을 말하면서 추천이 아니라 스스로 반장에 나서는 사람을 반장으로 세우고 싶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반장의 역할이 과중하지 않게 도와주겠다고 하시면서, 반장이 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눈에 띄지 않는 1, 2학년 시절을 보냈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들의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그렇게 나는 선생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3월 12일을 시작으로 날마다 편지를 써 주셨다. 날마다, 빠짐없이, 매일 매일, 꾸준히 무엇을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정말 선생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들의 하루를 편지로 열어 주셨다. 교사 초임 때부터 한 일이라서 편지 쓰지 않으면 더 불편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지금도 생각난다. 교실 뒤 게시판에 매일 매일 붙어 있던 선생님의 편지. 선생님 편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교실 문을 들어서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나는 교정의 흐드러진 목련의 향내도 선생님 편지 속에서 먼저 맡고, 학교에서 키우던 공작의 시끄러운 울음소리도 선생님 글 속에서 먼저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편지는 선생님의 세 번째 편지인데 3월 14일에 쓰신 것이다. 이 편지에서 우리 이름을 지어주셨다. 고 3이라는 무 생명체에 생기를 불어 넣어 팔딱 팔딱 뛰는 심장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그 편지를 그대로 옮겨 본다.
第 3 信 1984. 3.14 네 이름을 부르면 종소리가 들린다.
그런 詩를 쓰고 싶습니다. 그런 詩를 못 쓰더라도 그런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귀가 맑아지고 눈이 맑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그래서 생각난 것이 성성자(惺惺子)입니다.
조식(曺植)이라는 선조 때 선비가 뜻이 있어 젊은 나이에 지리산 기슭에 글방을 짓고 들어가 공부를 할 때, 기력 곧 정신력이 침체한 듯하면 허리춤에 달고 있던 종을 울려 스스로를 각성시켰다는 종이 성성자입니다.
그는 그 곳에 찾아 와 공부하던 문인(門人)들에게도 그 쇠 방울을 하나씩 나누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기력에 의하지 않는 어떤 동작이 나타날 때 성성자는 소리 내어 경계하고 꾸짖으니 공경할 만하고 두려워할 만하다. 이 방울에 죄 짓지 마라.”
후세에 속세의 욕망을 정신력으로 이기고 사는 사람을 일컬어 그래서 성성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소리 좋은 쇠 방울 하나씩 허리춤에 차보고 싶지 않습니까? 고 3 생활이야말로 일생에 한 번 쯤 성성자가 되어 볼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우리에게는 끝 모를 야망과 꿈이 있습니다. 그 야망과 꿈이 한갓 부질없이 피었다 지는 풀꽃이나 여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이 아닌 우리의 일생을 지배할 수 있는 고귀한 지표 혹은 명제가 되기 위해서 늘 상 우리를 지켜 줄 꿋꿋한 지조가 필요합니다.
나를 잠에서 깨우며 내 속에 숨은 무한한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영감과 창조력을 불어 넣어 주며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종소리.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종소리를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습니까? 그대들을 성성자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대학 시절 ‘조선 사상사’ 수업에서 남명(南冥) 조식을 배울 때 선생님이 말씀하신 성성자, 쇠 방울 소리가 떠올랐다. 쇠 방울 소리는 평생 한 차례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나 당대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올곧은 선비요,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직언을 펼쳤던 조식을 만나게 도왔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산림처사 조식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듯한 마음을 들게 하였다.
우리는 선생님의 편지를 모아 졸업 즈음 ‘성성자’라는 이름의 책으로 만들었다. 책 표지는 내가 그림 잘 그리는 교회 오빠에게 부탁했는데 커다란 종과 종소리를 표현해 주었다. 선생님은 악필이었는데 글씨 잘 쓰는 한 친구가 선생님 편지를 깨끗하게 옮겨 적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동의했다. 그 친구는 그 대가로 선생님 원본 편지를 가지겠다고 했다. 많이 아쉬웠지만 우리는 그도 동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선생님의 편지는 우리들의 졸업 선물이 되었다.
선생님은 수업도 남달랐다. 엄청난 독서량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인문학 전반을 넘나들며 풀어내던 선생님의 영어 수업, 나는 매 시간 경탄의 눈빛을 보냈다. 영어가 필요한 학문이고 재미난 학문이라는 사실을 선생님 수업을 통해 배웠다. 매시간 열강을 하느라 선생님 입 언저리에 머물던 침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불란서 동요와 솔개, 도요새 노래도 가르쳐주셨다. 서투른 노래 실력을 가지고도 당당하게 가르쳐주셨다.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그 시절 선생님은 4・ 19 혁명의 날,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도 낭송 해 주셨다.
선생님이 자습 시간에 떠드는 우리를 기합 준다면서 학교 동산으로 데리고 간 일도 기억난다. 선생님 따라 오르면서 어떤 벌을 받을지 떨고 있던 우리에게 선생님은 고개 들고 무엇이 있는지 보라고 하더니 소리치셨다.
“ 내가 새벽마다 오는 약수터다. 너희들 냉수 먹고 속 차려라.”
겁먹어 움츠려 있던 우리들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키득 키득 거렸다. 시원한 약수 물 한 바가지씩 들이켜면서 약수 물이 시원하다느니 맛있다느니 재잘 거렸다.
여름 무렵이든가? 선생님은 깜깜한 운동장 한편 불빛 있는 곳으로 우리를 자리 잡도록 하고 장기 자랑도 열어주셨다. 선생님은 우리 반 재주꾼을 다 알고 계셨던 듯하다. 아름다운 화음의 중창발표회도 열어주고, 끼로 뭉친 친구의 근사한 춤 솜씨도 보여주었다. 재담꾼 친구의 우스개 소리도 들려주었다. 그때 우리는 고 3이라는 어려움 잊고 깔깔대면서 즐거워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편지를 가져 와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내 제자 중에 가장 출세한 제자에게 받은 편지예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증평 사는 농촌 총각이랑 결혼해서 소 키우면서 살고 있지요. 시도 쓰면서 살아요.”
고 3 힘든 시기에 선생님 말씀은 얼마나 신선했는지 모른다. 흔히 말하는 출세의 잣대와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있다고 알려주어 감사했다.
학력고사 치르기 바로 전 날, 떨고 있는 우리를 앞에 두고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종례를 해주셨다.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 시험을 치는 고사장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혼자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이 함께 있고, 선생님이 함께 있으며, 언니랑 오빠가 그리고 친척이 옆에 있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신앙의 절대자가 곁에 있다고 생각해요. 뿌린 만큼 거둔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요.”
나는 선생님 말씀 덕을 톡톡히 보았다. 담담하게 시험도 치르고, 결과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복 많게도 나는 고등학교 를 졸업 한 후에도 줄곧 선생님과 인연의 실타래를 감고 있다. 대학 입학과 졸업, 취업, 결혼과 출산, 육아, 휴직과 복직 그리고 명예 퇴직. 그 중요한 시기마다 선생님의 격려가 있었다. 자유와 책임에 힘겨워하던 대학시절에는 힘을 북돋아 주고, 취업의 어려움을 겪을 때는 함께 안타까워 해 주셨다. 결혼과 출산을 한껏 기뻐해주고 시어머니 장례 때는 슬픔을 나누어 주셨다. 휴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내 건강이 나빠지자 매일 기도해 주셨다.
선생님 덕분에 고 3 때 같은 반 친구들과도 단단히 맺어졌다. 나처럼 선생님과 인연을 잇고 있어 자주 만나 온 친구들과 ‘성성자’라는 이름의 독서모임도 꾸리고 여행도 다니면 같이 나이 듦을 나누고 있다. 선생님은 가끔 우리 독서모임에 참여하신다.
선생님은 교직을 그만 두신 후 연극 대본 쓰는 일로 분주하게 보내고 영시(英詩) 쓰는 일도 병행하셨다. 구순을 앞두신 나이에도 선생님은 여전히 시 쓰고 기도 거르지 않고 매일 운동 하신단다. 하지만 몸의 노화는 선생님도 피할 수 없어 요즘 선생님은 자꾸 아프시다. 코로나를 겪은 이후 병고에 시달리는 적이 많아지셔서 염려스럽다.
선생님이 아프시지 않고 예의 총각의 순수를 지키시면서 내 곁에 계시면 좋겠다고 여기며 나는 상상한다. 선생님과 내게 남은 인연의 실타래는 또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