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사의 삶, 기억하고 싶은 현재로 풀어내기
* 2021년 역사교육연구소 소식지 <사발통문>에 실린 글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목차
1. 나의 자리, 역사교사의 삶 기억하기: (1) 신뢰구축 (2) 재미와 진지함
2. 학생들과 함께 한 역사교육 보고: (1) 역사수업 (2) 역사동아리 (3) 특별행사
3. 역사교사란 무엇인가, 퇴임교사 다시 묻다.
1. 나의 자리, 역사교사의 삶 기억하기
나는 2018년 2월 스물아홉 해 공교육 역사 교사 직분을 내려놓고 명예 퇴직하였다. 전교생과 교직원 앞에서 진행된 퇴임식에 고맙게도 졸업생들이 모임을 꾸려서 참가하고 나를 위한 특별 행사를 기획하여 주었다. 졸업 후에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던 3회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벌인 일이었다. 그에 답하여 나는 퇴임사 안에 부임 첫 해인 1990년, 순수와 열정으로 빛나던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처음 마음을 소환하고 감사하면서 마지막을 기쁘게 표현하였다.
공식 퇴임식 외에도 졸업생, 1학년 7반 우리 반, 역사동아리 토박이, 전교조 분회, 교내외 독서모임, 인천역사교사모임, 그리고 친구와 가족까지 퇴임을 기념하는 자리가 이어지면서 교사로서 보낸 과거를 매듭질 수 있었다. 퇴임 직후 남편 따라 중국에서 살았고 2020년 작년에는 사상 초유의 코로나 시대를 견뎌내었다. 그래서일까? 역사교사의 삶을 소환하려니 조밀하게 박음질한 옷감에서 실을 뜯어 내 듯 내 안에서 과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박음질 한 옷감의 단단한 매듭을 자르고 차근차근 한 땀 한 땀 풀어내듯 기록을 찾아 검증하고 과거를 살려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역사교사로서 변화 속에 상처 받으면서 값싼 낙관주의나 비관주의의 허무 속에 주저앉으려 했지만, 지켜내야 할 것을 확인하고 다시 또 다시 시작하고자 애썼던 과거를 말할 용기를 낸다.
(1) 신뢰 구축, 역사교육의 출발점
‘감히 꿈꾼다, 나의 수고를 통해 나의 학생들이 옳고 그른 것을 가를 능력을 갖추고, 옳은 것 중에서 가장 옳은 것을 고를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저마다 신나는 삶을 일구고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에 나서기를’
역사교사로서 나는 ‘섣부른 앎을 통한 평가’ 보다는 ‘따뜻한 애정으로 과거를 마주하고 느끼기’를 원했다. 학생들이 과거의 사람을 그들 삶 속으로 들어가 만나고, 현재 자기 자리에서 마주하도록 독려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과거 곧 ‘기억하고 싶은 현재’를 공부하는 일이 미래, 곧 ‘구현하고 싶은 현재’를 설계하는 여정이 된다고 생각했다. 인류가 공존과 연대를 꿈꾸면서 기꺼이 그 실천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엄정한 가르침을 어떻게 학생들과 나눌 수 있을까? 나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신뢰를 쌓는 일이라고 생각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 교육은 시작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역사 교육에 이르면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신뢰 구축이 자발성을 낳는 기초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급한 결과주의가 가져오는 강제성의 막대한 폐해와 자발성의 가지는 엄청난 위력을 알기에 신뢰의 구축을 교육의 출발점으로 강조하고 싶다.
나는 신뢰구축을 위해 교직 생활 내내 첫 수업에 유난히 공을 들였다. 3월 첫 수업, 나는 “신나는 세상 만들기는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여러분이 신나게 살기 위해 애쓴다면, 그래서 신나게 산다면, 그게 바로 신나는 세상 만들기다. 나는 여러분이 신나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을 믿는다”라는 이야기를 학생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을 연결하여 사는 것이야말로 즐겁고 신나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자신 있게 나는 역사교사로 사는 것이 힘든 일도 많지만 아주 즐겁고 신난다고 말했다. ‘어라? 이 선생은 조금 색다른걸.’ 이런 느낌이 학생들 가슴에 느껴지는 순간 나와 역사의 관계라는 다소 어려운 이야기도 집어넣었다. 역사가 구체화되는 지점이 바로 나의 삶과 마주할 때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역사라면 골동품이라고 여기는 학생이 아직 많기에 너무 앞질러 나가지는 않았다. 내 이름도 각인시키고 학생 모두의 이름도 부르며 학생들끼리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하였다.
그리고 3월 역사 수업 안내지를 배부하면서 앞으로 매달 수업 안내가 나가고 수업의 계획을 학생들 의견을 받아 보완하겠다고 말하면서 첫 수업을 마쳤다. 이러한 첫수업의 운영이 학생들에게 나를 친절한 역사교사로 여기도록 이끌고 신뢰의 씨앗을 심어주었다고 믿는다.
첫 수업부터 신뢰 구축 도구로 ‘수업일기’를 사용하였다. 수업일기는 매일 쓰는 학급일기이나 역사동아리일기와 달리 수업이 있는 날에 돌아가면서 수업 내용을 돌아보고 쓰는 일기이다. 솔직하기는 해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기에는 역부족인 학생들이기에 수업 일기에 마구 늘어놓는 불평이나 짜증, 분노에 상처를 입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일찌감치 오해의 싹을 잘라내게 하고 대화를 통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게 해 준 것도 사실이다.
수업 일기는 학생들이 쓰는 역사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수업 일기를 통해서 나의 역사수업을 평가할 뿐 아니라 현실과 조우하면서 역사를 기록했다. 수업 일기를 통해서 나는 학생들 주장의 대부분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다른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했다.
교과서를 넘어서는 나만의 교재인 ’배움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대학수학능력고사와 내신에서 여전히 선다형 출제가 다수를 이루는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입시가 끝나면 바로 휴지통에 버려질 정도로 학생들에게 외면 받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역사교사라면 교과서에 매몰되지 않고 교과서 너머 역사교육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에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배움책 제작 열기가 뜨거워지던 2000년 무렵 서툴게 동참하였다. 교과서 너머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와 검인정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고 난 후 더 깊어졌다. 하지만 배움책을 만들지 못하고 낱장의 학습지를 배부한 적이 더 많았다. 다만 그 경우라도 교과서의 한계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신뢰구축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업일기 두 편과 수업일기 공책 첫 페이지에 부착했던 수업일기 안내문을 싣는다.
2005년 3월 7일 월요일 약간 따뜻하고 맑음 1-3 강〇〇 제목: 첫수업과 정체성
사회교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친구들만 따라갔다. 박윤희 선생님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수업은 먼저 노래를 듣고 특이한 인사로 시작한다. 베트남 악기로 딱딱, 치면 우리들은 반듯하게 몸을 세우고 또 딱딱 치면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오늘 공부 잘하겠습니다. 자기 암시를 걸면서 “안녕하세요?”인사한다. 그리고 집중이 안 되면 “나의 하루· 나의 일생”을 특이한 박수와 함께 외친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배움책을 가지고 공부한다. 오늘 우리역사 배움책에서 내가 왜 지루한 역사를 배우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다. 최명희 선생님의 『혼불』에 실린 ‘나로부터 시작하는 역사’라는 글이 배움책에 있었는데 그 글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었다. 최명희 선생님은 혼불을 쓰려고 이 세상에 왔다가 혼불을 다 쓰시고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참 멋진 분이다.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내서 그 일 하고 죽고 싶다.
2006년 8월 18일 하늘을 보면 흐뭇하지만 아직은 덥다. 1-6 변〇〇 제목: 이것이 평화
오늘 수업시간에 생각나는 것은 대추리 동영상이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 애는 목소리가 큰 자가 이긴다는 법칙 같은 것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말소리는 그 애의 큰 목소리에 파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때 내가 슬펐던 것은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내 편이 되어주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심스레 대추리 사람들의 경우를 내 경험에 접목시켜 보았다.
대추리 사람들은 지금 부조리를 말하고 있는데, 큰 상대의 목소리에 파묻혀 외부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이 잘못 들리고, 작게 들리고, 안 들려서 여러 가지 오해들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무척 힘들어 보였다. 답답하고 원통한 것 같았다. 대추리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도 그런 뜻의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큰 도움’이 되는 일 같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말고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혹시 대추리 같이 우리들이 잘 모르는 부조리가 벌어지는 곳이 또 있지 않을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달려가서 해야지. 이게 오늘 수업시간에 내가 느낀 평화의 방법이었다.
우리들의 삶을 담는 공간 -수업 일기-
여러분과 올해 함께 공부할 역사 교사 〇〇〇입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처음 수업 때 가졌던 설레임과 단단한 각오로 1년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다짐은 날이 지나면, 퇴색하기 쉬워서 각오를 새로이 해 줄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들의 수업처럼 교사와 학생의 호흡이 무엇보다 소중한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업 일기’를 생각해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만나는 소중한 시간인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러분과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수업 중에 있었던 일을 여러분의 상큼한 시선과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꾸밈없이 솔직하게 적습니다. 무엇을 배웠는지 떠올리고,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내고, 아쉬웠던 점이나 선생님이나 급우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도 좋습니다.
수업 일기는 여러분과 내가 친해져야 수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기초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합니다. 1번부터 차례대로 쓰겠습니다.
*수업 일기를 받은 사람은
1) 자신보다 앞서 일기 쓴 사람에게 역사 선생님의 답 글을 보여줍니다.
2) 일기 받은 날짜, 날씨, 자신의 이름, 수업일기의 제목을 차례대로 쓰고, 오늘의 수업을 생각하면서 전체적인 글을 완성합니다. 반드시 잉크펜으로 씁니다.
3) 수업일기 받은 다음날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8시10분까지 교무실 역사 선생님 책상에 둡니다.
5) 다가오는 수업 시간에 수업 일기 쓰는 사람을 확인하고 그 사람이 보여주는 선생님의 답 글을 읽습니다.
과밀 학급, 거대 학교가 존재하는 한 계속 활용될 수업 방법은 모둠 학습이다. 나는 모둠을 구성하여 학생 활동이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수업에 적용하였다. 모둠 대표를 모둠원이 뽑게 해서 모둠 대표에게 책임을 부여하여 긴장하게 하고, 그에 상응하는 결정권을 주었다. 모둠과 관련된 일은 모두 대표를 통해 전달하고, 대표의 의견을 대폭 수용하여 수업의 얼개를 짰다. 그리고 모둠 구성원을 모둠 대표가 통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학생들을 믿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앞에서 더 잘하는 법이다. 아울러 이런 믿음은 자발성을 낳는다. 자발성의 위력을 확인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역사교육에서 놓쳐서는 안 될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교사는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게 도울 뿐이다. 자발적으로 역사 학습에 임했던 기억은 학생들에게 주인의식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2) 재미와 진지함, 두 마리 토끼
대하소설 『토지』를 보면 서희는 식민지라는 모순된 사회에서 공부를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항변하는 아들, 환국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결정해야 할 때 더 어려운 쪽을 선택하라고. 그러면서, 공부하지 않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고 일갈한다. 결국 환국은 일본 유학을 떠난다. 나도 내 앞에 선택할 일이 있을 때 더 어려운 쪽을 따르려고 했다. 나는 천박하리만큼 가벼운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도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그들과 소통하는 언어인 ‘재미’도 놓치지 않고,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진지함’이라는 코드도 놓지 않으려고 고군분투 했다.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만 포기할 순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칫 역사교육을 흥미위주로 이끌다보면 과거의 치열한 인간들의 삶을 우습게 대하고 현재의 우리 삶 역시 가볍게 여길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재미를 잃은 진지함은 학생들 앞에 머물지도 못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재미와 진지함을 모두 잡기 위한 수업을 구상하였다.
2. 학생들과 함께 한 역사교육 보고
(1) 역사수업 사례
1) 나의 역사 쓰기
나는 의식적으로 역사수업에서 ‘나의 생각’과 ‘나의 느낌’을 지나치다 여길 만큼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사회가 ‘나’를 제대로 드러낼 기회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과 돈을 들여서 자기 존재에 반하는 교육이 무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역사 쓰기’를 거의 모든 역사수업에서 진행하였고 첫 수행평가로 삼았다.
‘나의 역사 쓰기’는 교사의 친절한 안내가 제공되어야 단순한 신변잡기에 머물 위험을 벗어나 나와 역사(현대사)가 이어져 있다는 지당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현대사 연표를 제공하여 현대 역사가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왔고, 그 다음 자기 인생에서 기억에 남고 의미 있는 사건을 관련 사료와 함께 제시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후 나의 역사 쓰기를 A4 용지 1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로 만들게 하였다.
조금 더 욕심을 내어 ‘가족사 쓰기’까지 진행한 경우도 있었다. 가족사 쓰기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가깝게 느끼고 자기 존재를 확인하며 미래를 재단하는 지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역사 쓰기와 가족사 쓰기를 하고 나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고 밝혔다. 역사를 통해 평화와 공존 그리고 연대까지 확인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의 역사쓰기 결과물은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사례로 제시하지 않았다.
2) ‘고려냐 조선이냐’ 역사적 결단을 체험하는 여말선초 토론 수업
여말선초 그 역사적 결단이 요구된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는 수업으로 구성하였다. 먼저 여말선초 상황을 사료를 읽으면서 접근하였고, 토론의 주제와 같은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TV 역사교양프로그램 <역사의 라이벌, 고려냐, 조선이냐>(KBS1, 1995)를 함께 시청하였다. 그리고 토론에 발표자로 나설 4명의 학생을 지원받아 당시를 살았던 최영,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4명 중 1명의 인물로 분하여 그 인물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 결단을 주장하도록 지도하였다. 토론을 마치고 같은 주제로 논술 쓰기를 배치하였다.
나는 적어도 3번 발표자를 만나서 지원과 격려를 거듭하면서 발표 원고와 예상 질문과 응답지를 검토해 주었다. 그리고 토론 수업이 몇몇 말 잘하는 사람들의 잔치가 되지 않도록 발표자 4명에게 고른 발표 시간을 배치하였다. 토론은 발표/상호 질의와 응답/전체 질의(발표자를 제외한 학생이 4명 중 한사람을 지목하여 질문)와 해당 인물의 응답, 순서로 진행하였다. 토론을 마치고 이어지는 다음 시간에는 같은 주제로 논술 쓰기를 진행하여 개인의 판단을 글로 표현하도록 하였다.
토론 당일 발표 무대인 교실의 공간 구성을 설명한다면, 발표자를 제외한 학생들은 2군데로 나누어 앉도록 하였다. 가운데를 비우고 책상을 마주보도록 양쪽으로 배치하여 왼쪽에는 고려를 선택하는 학생이 앉고 오른쪽에는 조선을 선택한 학생이 앉았다. 토론이 끝나고 나서 학생들은 다시 한 번 고려인지 조선인지 선택하고 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사회자는 교사인 내가 맡았고 토론 당일 칠판에는 아래와 같이 토론 안내를 제시하였다.
여말선초의 상황을 어떻게 풀 것인가? 고려냐 조선이냐
고려 (체제내 개혁-고려 안에서 개혁)/조선(체제 개혁-역성혁명으로 조선 건국)
* 토론의 진행 순서
1) 발표자의 발표
발표1 고려(체제 내 개혁) 지지- 최영의 입장에서
발표2 조선(체제 개혁) 지지- 이성계의 입장에서
발표3 고려(체제 내 개혁) 지지- 정몽주의 입장에서
발표4 조선(체제 개혁) 지지- 정도전의 입장에서
2) 주제발표자 상호 질의와 응답
주제발표 1 <--> 주제발표 2 / 주제발표 3 <--> 주제발표 4
3) 전체 질의와 해당인물 발표자의 응답
4) 사회자의 토론 수업 마무리와 선택의 시간
3) 영화수업과 함께 하는 역사 상상화 제작
나는 수년간 과감히 3월 초 2차시를 확보하여 '불을 찾아서'라는 선사시대 인류의 삶을 담은 영화(상영시간 90분)보기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학생들은 선사시대 인류와 소통하면서 더 가까이 만날 수 있었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선사 인류와 소통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선사 인류의 삶을 담은 역사 상상화를 완성하였다.
4) 극화수업으로 통하다.
극화 학습이란 ‘역사를 극(劇)으로 표현하는 학습’을 말한다. 과거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기존의 문자라는 매체에 국한해서 사용하던 것을 넘어서 극(劇)이라는 표현 양식을 활용하는 역사 서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극화 학습을 초임교사 시절부터 오랜 기간 진행하였다. 그 결과 교사와 학생의 신뢰를 구축하는 일의 중요성과 자발성의 위력을 더 깊이 믿게 되었다. 학생들 스스로 역사를 표현하는 일을 같이 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로마공화정’ 극화학습을 마치고 쓴 내 글과 학생의 소감문을 한편 아래 실었다.
2001.6.20. 전국역사교사모임 극화모임방에 올린 나의 글
1학년 겨울 방학 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숙제를 내서 일찌감치 2학년에 만날 세계사 선생님이 보통(?)은 아닐 거라고 짐작하게 만든 후에 일일이 독후감을 체크하고 학기 초 극화 수업에 대한 안내를 했더랍니다.
진시황 발표 수업 때 간단한 극화를 시도한 모둠도 있어서 학생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참여했습니다. 중학생들이 쓴 극화 로마공화정 대본을 보여주고 '중학생도 했는데 우리는 고등학생아이가" 자존심도 건드렸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대본 쓰고, 연출하고 연기하고 스태프가 되어서는 웃고 기뻐해서 저도 덩달아 즐거웠습니다.
3개 학급에서 잘 된 모둠 연극을 뽑아 어제 저의 연구수업에 맞추어 다시 올렸습니다. 1) 로마의 탄생, 로마 건국신화 2) 로마 공화정의 성립 3) 영원한 자유의 이름, 스파르타쿠스 4) 운명의 날 3월 14일(시이저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3개 학급을 모아서 음악실에서 합동 수업을 했습니다. 우리학교 음악실은 작은 소극장처럼 지어져서 마치 작은 연극축제를 여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회과 선생님 10분과 함께 했습니다.
극화 수업 소감문(2-2 이〇〇) 2004년
솔직히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 시간도 별로 없는데 연극 연습, 대본 작성, 소품 만들기..이런 것들을 다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모둠은 우리 집에서 연습을 했는데 처음 할 때는 서로들 다 쑥스럽고 준비가 안 되어서 그런지 이것이 연극을 하는 것인지 코미디 쇼를 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러나 연습을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겨서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 수업을 오늘 하였는데 내가 주인공을 하였다. 머리가 나뻐서 그런지 대사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애드립이라고 할까 아니면 웃음... 이렇게 잘 넘긴 것 같다. 다른 조들과 비교해 볼 때 미흡한 점도 많았지만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협동, 상황대처 능력,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을 극화 수업 하면서 익힌 것 같다. 이제 이런 기회는 없을 지 모르지만 이번 연극 수업은 고등학교 생활의 좋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 반 모두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모두 다 좋은 점수 받으면 좋겠다
극화 학습 소감문 2000년 6월 인항고 2학년 오〇〇
역사적 순간을 21C에 재현하기까지...
고등학교 2학년을 준비하던 겨울방학 문과생들에게 세계사 과목 과제가 주어졌다. 과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독후감 쓰기이다. 나는 세계사를 배우는 데 많은 이점을 줄 과제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개학 후 과제를 제출하였다.
6월 세계사 선생님께서는 대단원 고대세계를 마치며 종합 정리 차원에서 로마를 소재로 한 극화 수업을 한다고 하셨다. 극화 수업이라.. 보충 수업, 특기 적성 수업은 해봤어도 극화 수업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소재를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푹 빠져 있었기만 하였지 카이사르를 무대에 어떻게 올릴지 영 대책이 서질 않았다. 또 어떤 부분을 극화에 담을지도 막막하였다. 더욱이 우리 모둠원들은 공부와 역사에 거리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윤태, 종현, 재민, 장혁 그리고 나는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극화 만들기에 돌입하였다. 우리들은 첫날 모임 헤어지기 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중 카이사르 부분에서 카이사르 죽음 전후를 읽기로 약속했다. 내용을 미리 알고 있던 나는 대본 집필을 하기로 했다. 4일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대본을 완성시켰다.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최후를 그린 내용이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기 전의 혼란스런 상황. 로마 제정의 길을 여는 카이사르에 반대하여 공화파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역사적 사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암살 전 공화정 유지파와 제정 사회를 이루려는 의원들 간의 긴장감까지 담아서 당시 로마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지금에 와서는 로마의 시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역사적인 날이지만 그 당시에는 지극히 평범한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 날이 극의 배경이다. 카이사르의 암살 장면은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면서 영화 ‘친구’에서 동수의 죽음을 패러디 하였다. 나는 공화정 유지파와 제정사회를 이루려는 의원들의 대립구조와 카이사르의 죽음 전후의 긴장된 상황 묘사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모처럼 만에 독서에 빠진 모둠 친구들도 책을 다 읽고 다시 모이게 되었다. 우리의 주요 모임 장소는 장혁이네 집이다. 장혁이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셔서 저녁 늦게 오신다. 덕분에 장혁이네 집이 우리 모둠의 주요 모임 장소가 된 것이다. 우리 탁자 앞에 놓인 것은 극화 대본과 ‘숯’ 이라는 모둠 이름 뿐이었다. 우선 극화의 틀을 잡기 위해 연구했다. 다행히도 연기지망생이며 연기 학원에 다니고 있는 윤태의 많은 의견으로 하나하나 채워 나가고 있었다. 윤태는 직접 연기를 보여주며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장혁이네 부모님께서 열심히 연습하는 우리들을 보시곤 자주 음식을 마련해 주셨다. 어쩌다 늦게까지 작업을 하게되면 장혁이네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땀방울이 흘려 발표 1주일 전이 다가오자 우리 모둠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배경음악을 맡은 재민이와 종현이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상황마다 분위기에 알맞은 배경음악을 찾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모둠은 10곡의 배경음악을 얻어내어 극화의 한 부분을 채웠다. 학교 다니면서 학원도 가야 하는 바쁜 친구들이었지만 힘든 기색 보이지 않고 모두 열심히 하고 있었다. 발표날이 다가오자 우리 모둠은 얼추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힘든 대사 암기도 완성 단계였다. 윤태의 연기 지적은 우리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잊게 하는 보약이 된 것이었다.
이번 발표는 멀티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인터넷 세대인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발표 이틀 전 무대 의상을 고민하던 나는 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넓은 성당 교리 교실에서 실전연습을 하였던 우리는 무대의상까지 도움을 받게 된 것이었다. 성당에서 빌린 제의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들의 의상과 거의 흡사하여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좋은 발판이 되었다. 발표 하루 전 우리 모둠원들은 확실하게 하기 위해 거듭 연습하고 수정해 나갔다.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약 한 달 간의 준비과정을 되돌아보며 우리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아무런 구상 없이 막막하기만 하였던 극화를 우리가 직접 연출하고 배경음악도 맡고 의상과 조명까지 만들어 갔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얻은 것이 참 많다. 작품 구상부터 연출까지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겪었지만 무엇보다도 밑줄 하나 긋고 빈칸 채우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역사공부를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이랑 역사는 이렇게 몸으로 직접 느끼고, 만지고, 표현해야 살아있는 역사를 배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역사를 배우고 우리나라의 국사를 배울 때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알 수 있고 또 우리의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학창시절 나의 소중한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로마공화정’외에도 모둠 발표 학습 후 창작 꽁트 극으로 구성했던 ‘고대인의 사랑’, ‘제자백가’, ‘진시황’이 있었고, 전국역사교사모임 선생님이 쓴 대본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였던 ‘재판극,신라의 삼국통일 평가’와 ‘방송극, 조선역사뉴스-제도의 성립’이 있었다.
그리고 음악교과와 협업한 ‘전태일 노래극’이 있었다. 비상한 노래 실력에다 타고난 유머를 가지고 음악 수업 50분 동안 학생들을 매료시키며 늘 자신의 수업을 개방하는 음악교사를 절친한 동료로 두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노래 좋아하는 내가 즐겨 음악수업에 참여하였던 경험도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2002년 두 사람이 2학년 문과반을 전담하는 교사가 되자 바로 의기투합하여 전태일 노래극을 만들기로 힘을 모았다.
현대사수업을 통해 전체 학생이 『전태일 평전』을 읽고 1995년 개봉했던 영화 ‘전태일’을 시청하면서 전태일의 시대를 이해하고 노동자의 삶을 느끼면서 창작대본을 만들었다. 음악수업을 통해 노래의 사회적 역할을 공부하면서 대본에 담을 노래를 선택하고 음악교사의 지도 아래 노래 연습을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태일 노래극을 학교 시청각실 무대와 소극장 음악실에서 제대로 올렸다. 나는 전태일 노래극을 녹화하여 학생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이 글을 쓰면서 영상물을 꺼내어 보았는데 그때의 감동과 세월의 두께를 실감하였다.
(3) 역사동아리 ‘토박이’ 활동
역사동아리 ‘토박이’가 처음 만들어지던 때를 돌이키자니 웃음이 난다. 열정만 넘쳐나던 새내기 교사 시절, ‘일단 시작하면 굴러간다!’ 라고 자신하면서 무턱대고 1주일 1회 1시간 운영되는 특활활동 부서로 역사반을 개설하였다. 쉬는 시간으로 여기는 특활시간에 누가 역사반을 고르냐며 만류하던 선생님들의 염려와 달리, ‘사립’ ‘남자’고등학교 역사상 1호 ‘처녀’ 선생님이라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니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돌볼 아이나 챙겨야 할 남편도 없었던 터라 역사 사랑이 충만한 열성분자 학생들이랑 특활부서 안에 일요일 답사 모임을 꾸렸다. 그 시절 전교조 인천지부의 향토교육연구회(인천역사 연구모임)는 열정만 넘치고 실력이 모자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요일 온종일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인천의 구석구석을 참으로 신나게 돌아다녔다. 우리가 나눈 땀방울과 맛난 도시락은 추억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져 있다. ‘우리가 선 이 곳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역사를 안을 수 있다.’는 울림도 그 속에 가지런히 들어 있다.
내가 부임한 1990년 에 입학한 토박이 1기( 3회 졸업생)들은 그 시절이 자신들의 고교시절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면서 그런 까닭에 일요답사의 성과를 모아서 학교 축제에 ‘역사전시회’를 하겠다고 나섰다고 말해주었다. 이 좋은 것을 우리만 알면 안 된다고 다부진 각오를 내비치면서 열심히 역사전시회를 준비했고, ‘토박이’라는 이름도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때 토박이가 새천년을 넘어 현재까지 이어질 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러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호응 속에서 제1회 역사전시회를 마치고, 다음해 또 그 다음해 일요답사와 역사전시회는 쉼 없이 이어졌다. ‘쉼 없이’, 그게 가장 중요했다고 나는 깨닫는다.
1994년 우리학교가 학생들의 줄기찬 요구를 받아들여 토요일 전일제 특별활동 시간을 편성하면서 토박이는 명실상부한 학생 자치의 동아리 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토박이 일기’는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희망을 나누는 보물단지가 되었다. 일기를 통해 나는 학생들과 호흡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내가 퇴임 때까지 변화하는 학생들 저마다의 ‘다름’을 잊지 않고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 날 수 있었던 데는 단연코 토박이 활동이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해를 거듭하면서 토박이는 인천을 너머 수도권으로 답사 지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독서토의, 영화보기, 문집 발간, 토박이 나무 심기, 역사인물 탐구, 슬라이드로 만나는 역사, 극으로 표현하는 역사전시, 인터넷에 토박이 공간 만들기(카페, 밴드)등 욕심내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고 대외적으로 활동을 확대하여 유명세를 누리기도 하였다. 내가 한 일이라면 학생들을 마냥 믿어주면서 지켜보았을 뿐이다.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면서 즐기는 모습은 내가 받는 선물이었다.
선배들이 심사위원이 되어 서류전형과 면접을 거쳐 새내기를 공개 선발해야 할 정도로 인기였던 토박이가 여러 가지 이유로 기피 동아리로 몰린 적도 있었는데 억지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소수의 새내기만으로 운영하면서 위기를 넘었다. 토요일 휴무라는 뜻깊은 노동 현장의 변화가 낳은 주 5일 수업의 시행이 오히려 동아리 활동 시간을 대폭 축소시키면서 토박이 기본 활동인 토요일 전일 답사가 위축되는 결과도 맞았다. 낙심했지만 선배 초청 강연회와 교육청이나 지역운동 단체와 같이 하는 일을 모색하는 등 새로운 활동 영역을 전개하였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미움, 질시, 오해, 갈등을 토박이라고 비껴 갈 순 없었다. 토박이 내부에서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질기게 얽힌 신뢰의 텃밭에서 그것들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순수한 처음 마음을 잃지 않는 한 진실은 언제나 사람을 움직이는 법이다.
나의 퇴임 이후에도 토박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모교에서 역사교사로 재직 중인 토박이 10기가 지도교사를 맡고 있다. 토박이 졸업생들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었던 ‘토박이장학회’를 나의 명퇴를 기념하면서 조성하여 2019년부터 해마다 토박이 2명을 포함한 재학생 총 4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나 역시 장학회에 참여하면서 토박이에 남아 있다.
(4) 특별행사, 학교 안과 학교 밖을 넘나들면서 역사교육 하기
나는 교직 내내 역사교사로서 교과전문가로 자리매김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학급운영도 역사교육의 연장에서 꾸렸다. 행정업무 역시 역사교사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역사행사를 기획하고 예산을 확보하여 진행할 수 있었다. 계기교육 담당자였을 때는 전교생에게 ‘역사편지’를 배부하여 기념일을 기억하는 장치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역사행사의 진행과 역사편지의 배부는 역사동아리 토박이의 절대적인 동참으로 가능하였다. 그리고 교내와 교외를 배경으로 다양한 모임을 꾸려내어 역사교육을 진행해 보았다. 천성이 사람이랑 어울리는 일을 즐겨하는 터라 더 재미나게 놀고 싶어서 꾸린 일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의 현재성을 전달하고 싶어서 교사모임 단체 대화방에 내가 올렸던 글을 그대로 가져왔다. 5) 역사캠프는 인천역사교사모임이 중학교, 고등학교 급간과 인문계와 전문계고의 경계를 허물면서 인천의 학생들이 자기가 선 인천의 땅을 사랑하도록 돕는 행사였다. 나의 진행 글과 참가 학생의 소감문을 덧붙였다.
1) 8월29일 경술국치, 역사의 날 행사 (2004)
교문 옆에 ‘경술국치(1910.8.29) 기억하고 평화세상 만들자’ 플랜카드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8월 29일 방송으로 역사의 날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과거사청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해방 후 여전했던 친일파의 득세를 통해 친일세력을 타도하려던 세력이 오히려 친일세력에게 타도된 불우한 우리 역사, 정의의 잣대로 현실을 재단하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라는 천박한 기준만으로 현실을 대응하도록 길들여진 우리 모습을 돌아보는 자리였습니다.
이어서 재미난 문제로 역사의 날 경술국치를 기억하는 퀴즈대회를 열었습니다.
'평화'를 주관식 답으로 만들고 '대한민국'으로 사행시를 짓도록 했습니다. 미리 확보된 학교예산으로 풍성한 상품도 준비했고, 사행시 수상자는 상장도 수여하였습니다.
역사동아리 토박이 2학년과 8월29일 날짜에 맞추어 '경술국치 기억하고 평화세상 만드는 역사도서 전시회'도 준비했습니다. 우리학교에서 처음 하는 도서전시회였는데 학생들 호응이 컸습니다.
2) 11월 3일 학생의 날, 역사의 날 행사 (2005)
우리 학교는 2000년 전교조 합법화 시작 년부터 학생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학교차원에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전교조 소속 교사들을 중심으로 학급별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학생의 날을 기념한다는 것만으로도 불온세력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는데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도 학생들은 웃을 겁니다. 다행이지요.
2005년 11월 2일 그러니까 학생의 날 전날, 교문 위에는" 선생님들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플랜카드가 달렸습니다. 내일이 학생의 날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11월 3일 우리 학교 졸업생 선생님이랑 저랑 제일 먼저 교문 앞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박수치면서 학생의 날 정문 이벤트를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선생님들이 하나, 둘 모여듭니다. 대략 30명, 교사들의 박수소리 환호소리 제법 큽니다. 상기된 얼굴로 벌쭘 하면서 들어서는 대부분 학생들은 선생님들 환호에 당황해하지만 기분 좋은 티내면서 지나갑니다.
올해는 역사과 동료선생님이 도화지에 "여러분 사랑합니다."등 여러 따뜻한 말이 적힌 글과 학생의 날 기원인 된 1929년 광주 학생 의거 때 시위 구호도 적어 와서 선생님들이 그걸 들고 이벤트를 벌일 수 있었습니다. 연극 대사처럼 구호를 외치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즐거웠습니다. 학생의 날 등교 길 이벤트는 얼굴도 보기 힘든 고3을 잔뜩 볼 수 있어서 더 좋다고 선생님들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3학년이 들어서면 선생님들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학생 축하해주고, 얼마 남지 않은 대수능 잘 보라고 격려했습니다. 등교 이벤트를 마치면 학생의 날을 기념하는 역사의 날 기념 방송을 진행합니다. 역사과 선생님이 학생의 날의 역사와 고3을 격려하는 메세지를 전해주었지요. 또 학생회장은 학생의 날을 맞는 우리 각오와 고3의수능을 응원했습니다.
이어진 역사의 날 행사의 하일라이트 역사퀴즈
ARS퀴즈만큼의 난이도를 가진 엽기보다 황당한 객관식 문제가 학생들을 자지러지게 했지요. 예를 들어 학생의 날을 없앤 사람은? (정답: 박정희)를 물으면서 객관식 문항에 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정문을 지도하는 악명 높은 학생부장 선생님, ② 부시 ③ 이시하라가 나오는 식이지요.
또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있는 기념비에 적힌 문장인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생명이다.’에서 '피 끓는'에 괄호를 치고는 ① 피 끓는 ② 물 끓는 이런 식으로요.^.^ 문제 하나 하나 낼 때마다 울려 펴지는 학생들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습니다.
더불어 낸 사행시 제재는 ‘학생만세’였습니다. 제가 이 행사를 기획하면서 18만원이라는 상품비를 타냈는데요. 덕분에 학생들 참여를 끌어내기 쉬웠습니다. 굉장히 많은 학생들이 역사퀴즈에 응모해서 추첨하고 사행시 우수작 고르느라 고생했지만 행복했습니다.
3) 새로운 만남, 넓은 세상으로, 학생과 함께 홍세화 선생님을 만나다. (2003. 6.4)
인천의 한 학교가 분회차원에서 홍세화 선생님을 초대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작년에 저하고 홍세화 선생님 책을 가지고 토의도 하고 저만큼 홍세화 선생님을 존경하는 고3 학생이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그 학생을 불러 넌지시 “ 단오에 홍세화 선생님이 인천에 오시는데..”이렇게 운을 떼었더니 곧바로 “그래요? 선생님 저 데리고 가주세요” 이러더군요. 어찌나 예쁘던지.
분회선생님들이 뒤풀이에서 저와 고3 학생의 자리를 홍세화 선생님 좌우에 마련해 주었어요. 아주 가까이서 홍세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저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고3 학생이랑 저랑 집으로 가는 방향이 맞아서 함께 택시를 탔거든요. 제게 자꾸 고맙다고 하는거예요. 그래요. 10대에 이렇게 좋은 만남을 가졌으니 그 학생의 미래는 분명 창창할 거예요.
4) 교사, 재학생, 졸업생, 자퇴생이 함께 독서토의하다. (2002. 5.15)
5월 15일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를 읽고 독서토의를 진행했습니다. 스승의 날에 나를 찾아오겠다는 졸업생에게 과거만 파먹지 말고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으니 오전 수업만 하는 그날 잡힌 교사독서모임에 참석하라고 말했는데 흔쾌히 좋다고 하기에 용기가 나서 참가자를 늘렸거든요. 그래서 교사 5명(신임 선생님 1명), 새내기 산소 학번 졸업생 1명, 재수생 1명, 토박이문집 본 분만 아는데 자퇴생 1명,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독서토의를 했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졸업생과 독서토의 한다기에 부러워서, 또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 박노자 교수 책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을지 알고 싶어서 저지른 일이었는데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라는 간격을 없애고 교사와 학생이 같은 자리에서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은 참으로 짜릿했습니다. 책이 다루는 내용이 우리 한국의 초상인지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귀중한 토의가 가능했습니다.
5) 역사캠프로 여럿이 다 함께 역사와 놀다. (2001.8.13.~15)
<역사캠프 소감문>
인천의 역사 속으로
계양중학교 2학년 김〇〇
13일, 금요일 너무 기대되는 마음에 학교생활도 즐겁게 마치고 6교시가 끝나는 대로 친구와 함께 인천 시청 역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강화도로 가는 버스 안, 그 곳에서의 교육을 기대해본다. 도착하자마자 먹는 밥, 강화도 쌀이라서 그런지 더욱 맛있었다. 밥을 먹고 난 후 약간의 휴식 시간이 있었다. 휴식 후 우리는 오리엔테이션 수업을 받았다. 오리엔테이션을 하신 선생님은 바로 이 제은 선생님이셨다. 선생께선 정말 멋지셨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각 학교별로 소개시간을 가졌다. 여러 학교에서 온 친구들, 오빠, 언니들을 보니 왠지 느낌이 새로웠다. 그래도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제 학교별로 움직이는 건 그만이다. 조별로 다니는데 나는 5조가 되었다. 그 안에서 더욱 세세한 자기소개를 하고 조장을 뽑았다. 나의 현란한 말솜씨였을까 내가 조장이 되었다. 그래도 조에서는 가장 어린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됐었다. 이렇게 바쁜 하루가 지났다.
14일, 아침 일찍 일어나 활동을 하기 위하여 바삐 움직였다. 첫 번째로 우리는 버스를 타고 광성보에 도착하였다. 이번 활동은 조별로 스티커를 많이 받는 팀에게 상품이 있다고 한다. 광성보 안에 계시는 선생님들을 찾아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우리 조는 홍이포를 시작으로 용두돈대를 마지막으로 하였다. 내가 가장 흥미 있게 봤던 것은 손돌목의 전설이었다. 손돌의 호의를 무시한 임금의 헛된 마음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광성보의 여러 군데를 돌아보며 푸는 문제는 사전 오리엔테이션의 도움이 컸다.
그 다음은 전등사. 올라가는 길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족산성에서 바라본 강화도의 모습이었다. 초등학생 때 전등사에 와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정족산성이 있는지도 몰랐다. 산길이 조금은 험했지만 올라간 보람이 있었다. 산위에서 조원들과 함께 찰칵! 사진을 찍고 빨리 돌아 왔다. 1등을 돌아오는 조는 드림파이와 몽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전등사 코스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았다. 조원들과 함께 이 답 저 답을 외치며 서로 웃기도 하고 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하였다.
마지막 코스, 역사관. 사람들이 너무나도 붐벼 발 디딜 틈도 없던 그 역사관은 강화도의 유물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다. 역사관을 나가 좀 더 가보니 탱자나무가 있었다. 가시로 적군을 막았다는 기특한 나무. 비석군에서 여러 비석을 보며 분석을 시작해 나갔다. 문제는 거의 언니, 오빠들이 맞혔다. 나도 맞힐 수 있었는데.
오후 활동이 시작되었다. 움집 짓기, 탁본 그리고 민속놀이를 직접 체험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새끼줄을 꼬아서 조별로 줄넘기를 하면서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항상 단체줄넘기는 못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나도 우수한 실력을 뽐내어서 기분이 좋았다. 탁본 시간에는 정말 뿌듯할 정도로 예쁜 작품이 나왔다. 탁본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저녁이 되어서 조별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우리 조만 불판이 없어서 늦게 먹기는 했지만 우리는 서로 챙겨주면서 열심히 먹었다. 기대하고 있던 레크리에이션 시간에는 마음껏 소리 지르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모르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하고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뒤, 드디어 스티커를 제일 많이 받은 조를 뽑는다. 우리조가 1등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3등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항상 1등으로 들어왔으니까 실망은 안한다. 볼펜 3자루씩 받고 여러 상자 중 하나를 꺼내 왔다. 그 상자 속에는 과자가 많이 들어있었다. 원으로 앉아 과자도 먹고 서로 음료수도 따라주면서 야식을 즐겼다.
15일, 마지막 날이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동인천 쪽에 있는 개항장에 간다. 우리 조는 길을 찾다가 시간을 허비했다. 차이나타운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중국 만두도 보았고 신기한 장난감들도 많이 보았다. 우리는 문제도 해결하면서 여러 것을 보았다. 이 날은 청 조계지역, 일본 조계지역, 자유 공원 등에 갔다. 광범위한 지역을 둘러보아서 머리가 아찔했다. 점심시간에는 차이나타운에서 맛있는 자장면을 먹었다. 나중에 가족과 함께 또 가고 싶다. 정해진 코스를 다 돌고 난 후에 집합장소로 모였다.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서로 문자 보내기를 약속하고 집을 향해 갔다.
역사캠프를 다녀와서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애정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인천에 있는 역사를 알아보았으니 나중에는 경주 유적지나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해 볼 생각이다. 나에게 역사캠프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내게 이런 기회가 주어져서 정말 감사하고 앞으로도 사회와 국사 수업을 열심히 들어 외국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역사를 설명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할 것이다.
역사교사란 무엇인가, 퇴임교사 다시 묻다.
‘ 역사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지금, 여기’에서 나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역사교육은 무엇인가? 나의 학생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발성의 위력을 확인하며 역사의 주인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아마도 역사교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계속 회의하고 힘겨워할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고민이야말로 제대로 역사 교육하는 힘을 키우는 토양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공교육 역사교사의 자리에 있을 적에 쓴 글을 퇴임 교사로서 읽으며 다시 묻는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역사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사란 무엇인가? 역사교사란 무엇인가?’
여전히 시원하고 또렷하게 답하지 못하겠다. 단지 이 질문을 붙들고 교육 현장을 지키는 역사교사가 역사교육의 목표에 가까워 질 수 있으며, 앞서서 질문의 답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는 있겠다. 다만, (역사)교사는 ‘흔들리는 나침반’으로서 ‘교육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엄정한 원리를 따라 ‘바로 지금’ 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존재라고 말하련다.
글의 마무리에 이르러서 알아차린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사람들이 유익했다고 여길까?’ 부담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서 나를 위해 내 이야기를 정리하였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글을 마치는 지금, 나는 역사교사로서 살면서 절망 속에서 아프고 힘든 적도 많았지만 희망을 되찾아 학생들과 나누면서 행복했다고, 그리하여 지금도 행복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후배교사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역사교사의 소망을 가지고 대학 합격이라는 기쁨을 누리면서도 불투명한 미래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시간이 갈수록 교사로 임용될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현실에 짓눌려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간절하게 교육현장에 들어 왔으나 오히려 갑갑하고 고통스럽다면 두려움이나 괴로움, 고통스러움이 자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두려움, 괴로움, 고통스러움은 건강을 좀 먹고 절망을 키우며 과거와 미래에 자신을 붙잡아 맨다.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현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놓치지 말자.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내자. 홀로 외로움 속에 방황하지 말고 연대의 끈을 놓지 말자.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는 루쉰의 말에 의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