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숙여사의 한국전쟁
어제처럼 생생하다.
양태숙 여사의 한국전쟁
우리 엄마 양(梁) 태(泰) 숙(淑) 여사
1936년 9월 6일
황해도 벽성군 청룡면 덕명리 주동 출생
수양산 아래 드넓게 펼쳐진 논과 밭
황해도 섬 용매도 눈에 잡히고
옹진군 섬 연평도가 어리던 바닷가
민어랑 조기랑 조개 풍성
가난한 사람도 품는 동네
마을 유일(唯一) 시계 있는
양조장 집 맏딸
말 타던 외할아버지
꽃밭 만들고 장어도 구워주셨다
포동포동 살 집
부잣집 맏며느리 감 부러움 샀다.
외할머니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내 딸 절대
일에 파묻히는 맏며느리 안 시킨다.
1943년 4월
여덟 살, 영양보통학교 입학
책 보따리 어깨 매고 친구랑 뛰어갔다.
고름 풀어지고 뜯겨도 키득키득 웃음만 났다.
모모다로상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노래 지금도 일본어로 부를 수 있다.
조선 말 한다고 조선 선생에게 뺨을 맞았다.
순사가 동네 할아버지를 마구 때리는 걸 보았다.
열 살 나이 1945년 8월 드디어 해방
마을에서 제일 먼저 한 일
장정들이 우르르 신사를 부수어 버렸다.
학교에서 배우던 일본말은 금방 잊어 버렸다.
1950년 5월 열 다섯 살 나이
황해도 연백군 연안여자중학교 합격
영양공립국민학교에서 중학교 진학한
여학생은 세 명뿐.
합격통지서 받아 든 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한 달 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일요일 아침 총소리에 놀라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으로
연안중학교 3학년 외삼촌,
조카들 챙기던 고모할머니랑
길을 나섰다.
교복 입고 영어 교과서 넣은
책가방 들고서
운 좋게 배 타고
용매도, 월미도,
걸어서 인천역 도착.
서울 함락 소식을 들었다.
고향 길 무너지고
서해안 따라 피난민 무리 속
남으로, 남으로
걸었다.
피난 길
신세 지는 집마다 주소 물어 적었다.
나중에라도 꼭 은혜 갚고 싶은 마음에.
7월 부산 도착하자 주소록이 문제 되었다.
엄마가 울어대자 취조는 그쳤지만
끝내 주소록은 받을 수 없었다.
넉 달 피난민 수용소 생활
쥐꼬리 배급에 동냥질도 했다.
눈 껌뻑이며 서있으면
누군가 밥 한 숟가락 던져 주었다.
미군도 처음 보았다.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고
초콜릿과 커피를 던지는 그네들
신기하고 무서웠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10월 말 기차 타고
서울 큰 고모할머니 집에.
새까만 얼굴, 교복 한 벌로 버텨낸 엄마
신발 밑창은 오래 전에 없어졌다.
헤진 옷은 너덜너덜
뒤늦게 알아본 큰 고모할머니
눈물만 흘렸다.
옷 얻어 입고
신촌에서 경의선 타고,
문산에서 임진각까지 걷고
토성에서 황해선 타고,
겨우 연안 하숙집 도착
제일 먼저
외삼촌과 학교 가서 등록 마쳤다.
서둘러 돌아간 고향집
반동분자 외할아버지
몰수되었던 집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형제는 연평도로,
외할머니와 엄마 동생들은 외할머니 친정으로
홀로 남아 고충 심했던 외증조할머니는
가족이 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고마운 일이라고 말씀하였다.
많은 사람이 죽임 당했다 들었다.
서로 겨누면서
끔찍하게 어처구니없게
친구 아버지, 6학년 담임 선생님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 동네 머슴
동갑내기 친구 황선숙 ......
생생한 얼굴들이었다.
전쟁이 끝나려나
이듬해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후퇴
중공군 오면 다 죽인다고 했다.
온 가족 모두 바리바리 이고 지고
다섯 살 어린 동생, 우리 이모는
울지도 않고 춥단 소리 않고
잡은 손 꼭 쥐고서 따라 왔다.
피난살이 호되었지만 함께 라서 견뎠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체결
양태숙 여사 나이 열여덟에
엄마 고향은 38도선 이남에서
휴전선 이북으로 바뀌었다.
오고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우리 엄마, 양태숙 여사는 말한다.
“길어도 석 달이면 고향에 돌아갈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피난 나오지도 않았어.
나는 전쟁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가슴이 벌렁거려서 전쟁 영화도 못 봐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야.
미쳐서 돌아가. 멈출 수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