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피할 수 없는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영원히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 방 침대 옆 벽에 붙어있는 말이다.
22년도 여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받아 온 문구인데
침대에 누울 때면 이 글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내 방점은 어디에 찍혀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크게 생각했던 때가 있다.
시간의 힘은 늘 조금씩 바뀌어진 모습들로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이에 굴복하지 않는 것들의 견고함에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내 오랜 꿈은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 줏대 있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변치 않을 가치와 정체성이 있어
나를 빛내주기를,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삶의 파도에서 고집했던 나다움은 되려 나를 꺾어 버렸다.
새로운 환경, 사람, 일상의 변화 속에서 멀어져버린 나다움에,
스스로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마주하며 한없이 실망했고, 그렇게 길을 잃었을 때 원망의 화살은 스스로에게 꽂았다. 나의 좋은 모습만을 사랑해서 힘들었던 날들이었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말뿐이었나 보다.
다양한 경험 아래 틀어진 나의 모습에는 어떤 자비나 포용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정의한 나다움에는 나의 성취와 바람만 담겨있을 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낯선 '나' 혹은 변화하는 나를 위한 자리는 없어 공허했다.
MBTI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어렴풋이 짐작했던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성격의 장단점 할 것 없이 각 유형별 매력으로 떠들썩했던 사회적 분위기에 위로받으며 스스로를 안다고 생각했을 때쯤 어느새 나의 MBTI는 바뀌었다.
지금껏 큰 실패 없이 살아온 안정추구형 나의 인생은
첫 직장생활의 이탈과 함께 무너졌다. 선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겠다는 나의 꿈은 퇴사와 함께 와해되었고, 무너진 인생 계획에 단단히 묶여 나를 잃었다는 불안과 조급함에 휩싸였다. 포기에 집착하며 좁아진 시야와 생각은 새로운 나와 미래를 쌓아갈 자신감이나 여유의 싹을 틔울 자리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한동안 웃지 않았고, 나를,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돌보지 못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분명한 건,
그렇게 빌린 시간의 힘은 나보다 힘이 셌다.
필연적인 슬픔과 절망의 시기를 거쳐 벌어진 시간은 회복의 기운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의 나로 이끌었다. 첫 퇴사 이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일과 삶의 가치 그리고 나를 재정비하는 일에 집중했다. 피할 수 없는 변화의 파도 속에서 나를 탐색하고, 경험하며 꾸준히 살피는 것. 정적이던 나에서 파도의 흐름에 맞추어 유영할 수 있는 내가 되도록 변화해 갔다.
그래서 내 방점은
'영원히 지켜야 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는 변화의 파도'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을 적는 버킷리스트.
나는 거꾸로 살면서 내가 절대 하지 않을 것들을 써보았다.
1. 소설책 읽기
2. 여행하기
3. 내 모든 여정의 기록을 남길 것
목록만 보면 언뜻 버킷리스트 같기도 하지만
안정과 효율을 추구하던 내가 새로운 가치를 찾아 변화하고, 도전하는 일이었다.
1. 소설책 읽기
그토록 기다려 온 학생 시절을 지나고 나니
긴 호흡으로 집중력 있게 책을 읽어나간 경험이 현저히 줄었다.
특히 극 'S'였던 나는 소설과 거리가 더 멀었는데
팍팍한 현실에 말랑말랑한 사고와 감각의 확장이, 다양한 삶의 이야기의 위로가 필요했다.
결국 필요에 의한 소설이었으나 픽션이 논픽션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했던 나였기에 이야기가 주는 자유로움을, 필력의 아름다움을 만끽해보는 내가 되어보기로 했다.
2. 여행하기
열심히 사는 것, 성취해 내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여행은 사치의 영역이었다. 무엇보다 여행 그 자체에 큰 흥미가 없었고, 휴식으로서도 가성비를 따졌을 때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계속 변화하며, 낯선 환경과 경험 속에서 곧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아서 일지
내가 몸담지 않았던 곳에서 장기간 살아보기, 혼자 여행하며 오롯이 나 스스로를 책임지는 독립심과 자립심을 키워보고 싶다. 나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어졌다.
3. 내 모든 여정에 기록 남기기
'시험기간만 끝나면, 학생 시절만 끝나면, 취업만 끝나면, 돈을 모으면'을 되뇌이며 행복을 미뤄온 삶이다.
하지만 인생에 중요한 가치는 단일하지 않아서, 중요한 할 일들 속에서도 하고 싶은 것들을 같이 해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핑계를 대며 내 인생을 할 일들로만 채웠던 삶은 훗날 돌아보았을 때 아쉬움을 남겼음을 기억한다.
무엇보다 잘 될 때의 나만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보여주기식의 삶은 살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 시절의 나에 대한 존중의 마음으로 꾸준히 나를 찾고, 경험하며, 기록하는 삶.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용기내본다.
나의 '절대 하지 않을 것들'은
그동안 나라는 세계 안에서 미처 발견되지 못한 혹은 방치된 의미, 한계 또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이전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들이 나의 세계가 깨졌을 때 비로소 새로운 나와 함께 가치를 갖게 되었고, 이 글 또한 절대 하지 않을 것의 일원이다.
물론 그럼에도
'영원히 지켜야 하는 것'에 나의 빛깔과 초심이 현실에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에 바램들이 나를 위축시키지 않도록 다양한 나의 모습을 담아보며 마음의 포용력을 넓혀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