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마

by 안개바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밤 9시 퇴근길에도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고 있다니,

망할 일기예보에는 오후에 맑아진다고 했었다.
우산을 쓰고 최대한 비를 안 맞으려고 애써보지만 몇 걸음 못 가서 엉덩이까지 젖어버렸다.
이제 옷이 젖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겠다.
포기하니까 마음도 편해진다.


버스정류장에는 하루의 먹이를 구하는데 성공한 전우들이 배차시간은 한 번도 지킨 적 없는 8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엔 오늘 명예롭지 못하게 명예퇴직 당한 김 부장도 있다. 퇴직하는 날까지 야근을 했다고 투덜대는 자유인 김 부장과 주말에 술 약속을 했다.

나는 옷도 젖은 김에 걷기로 한다.

GS 편의점에서 다섯 번째 가로등, 며칠째 지직 거리며 혈관이 타들어 가지만 신경이 끊어지기 전에는 고쳐줄 생각이 없나 보다.
앞서 걷던 베트남 여자 둘이서 투명우산 하나에 머리를 기대고 큰소리로 웃는다.
고음의 웃음소리가 탄산수처럼 청량하다.
웃는 소리에 잠시 우울감이 사라졌다. 순간 인도로 바싹 붙어가던 벤츠가 물 한양동이를 뿌리고 줄행랑치는 바람에 기분이 안 좋다.

옷은 이미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 더럽다.

이 와중에 베트남 여자들은 벤츠 뒤꽁무니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깔깔댔다.

부럽다. 웃을 수 있는 두 마음이.


아스팔트에 일렁이는 불빛들.

문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성산포에 가고 싶어졌다. 성산포가 멀다면 추암의 검푸른 밤바다도 좋겠다.

아내가 좋아하는 상상의 달인 빨강 머리 셜리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상상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나는 물벼락을 맞고 바다를 상상했을까.

설마 내가 그렇게 멋진 상상을 했을 리 없다.

내 의식 속에는 이미 바다가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가도로 밑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린다. 전조등 한쪽이 깨진 트레일러가 무심히 지나간다.

사망사고 많은 곳이라는 시뻘건 경고 표지 앞에서 한 사람이 무단횡단을 한다.

얌전히 기다리던 네댓 명의 보행자들이 그를 따라 길을 건넜다.


신호등 건너편 대박 로또방.

로또용지에 심각하게 점을 찍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지만 서로가 빠르게 외면한다.

콧수염을 기른 내 또래의 남자다.

나는 복권 5천 원어치를 자동으로 샀다.

"대박 나세요."
복권방 주인이 습관적 은총을 내려준다.
그 말에 아멘이라고 답하려다 피식 웃고 말았다.

복권이 젖지 않게 휴대폰 케이스 깊숙이 보관한다.

아마도 아내에겐 복권 샀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당첨되면 한 달에 오백만 원씩 능력 있는 남편처럼 월급이라고 갖다 줘야겠다.

우리은행 앞에서 올려다본 상가건물 이층 첫 번째 집에 불이 켜져 있다.

오늘도 아내는 상추를 씻었을까?

해마다 이맘때면 주인집 노부부가 텃밭에서 솎아온 상추를 하루가 멀다 하고 가져오는 바람에 이틀에 한 번은 상추를 먹는다. 아내 말로는 노지에서 키운 거라 잎도 작고 벌레도 많아서 한 시간을 씻었다고 한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씻은 상추를 입이 터져라 십 분 만에 다 먹어 버리고, 아내가 하는 말에 적당히 리액션을 한다. 더러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한쪽 끝이 꺼멓게 말라가는 주광색 형광등을 갈아달라고 하지만 내일 해준다 말하고 잠이 든다.


비는 더 시끄럽게 창문을 때리는데 나는 잠 속에서 성산포의 파도소리를 아주 까가이서 듣고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