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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pr 18. 2023

흔들리는 새벽



내가 영준이 일하는 다방에 오지 않는 이유.

저 자식의 느끼한 멘트와 우수에 젖은듯한 가식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마가린 최다. 우리끼리 있을 땐 개차반인데 Music Box 안에 들어가서, 헤드폰만 뒤집어쓰면 마가린 멘트가 줄줄 흐른다. 느끼하지만 능력은 있어서 DJ준 보려고 오는 팬이나 죽순이들도 많았고, 나름 이 바닥에선 매상 올려주는 DJ로 알려져 있었다.

다방에 들어서자 에코를 얼마나 깔았는지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영준의 목소리가 왕왕거렸다.

"내 타임 10분 남았다. 할 말 있으니까  끝나고 동동주나 마시러 가자."



일본에서 온 그녀


학사주점 뜨락 동동주에 파전.

한 번도 배신하지 않는 정직한 맛이다.

"어제 우리 다방으로 수민이 왔더라."

마가린 최가 말했다.

결혼해서 일본으로 간지 일 년이었다.

순간 모든 것이 암전 한다.

"너 연락처 물어보길래 모른다 했고, 입장 난처하니까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말 안 하려다 너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아서 말한다. 동생 결혼식인데 일주일 있을 건가 봐. 이거 뭐 삼류 비디오도 아니고 아- 유치한 것들."

술잔이 채워졌다.

마가린 최가 내 눈치를 살폈다.

"뻔뻔하게 너 보고 싶다더라."

술잔이 채워지고 심연 깊숙이 가라앉았던 그녀의 기억이 술잔 위에서 넘쳐흘렀다.



바람의 길


이놈의 옥상 철계단은 언제나 위태롭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모든 것이 흔들렸다. 녹슨 철계단이 흔들리고 난간이 흔들리고, 두 다리도 흔들렸다.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은 흔들리지 않고 달빛에 꽃잎을 접고 일편단심 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못 봤을까. 소피아 로렌 몸을 감고 올라가는 나팔꽃 한줄기, 한 계절 기생하려면 해바라기가 딱이지. 해가 뜨면 너도 꽃잎을 열겠구나.

옥상에서 듣는 지하철 막차의 아쉬운 소음.

갑자기 눈에 보이는 화구들이 불쌍해 보인다. 붓도 불쌍하고 페인팅나이프, 테레핀, 린시드, 팔레트에 짜놓은 굳어버린 물감, 석고상 줄리앙까지 눈물겹게 불쌍하다.

나까지 불쌍해 질까 봐 화실을 나와서 골목길을 쏘다녔다.

나는 바람의 길을 알고 있다.

이천 쌀집 골목과 미래 미용실 골목은 바람이 지나는 통로이다. 원주 식당 골목은 바람이 죽어서 쌓이는 곳이지. 

습관처럼 새벽의 골목길을 배회할 때면 유기견이 된 것 같은 착각과, 혹시 반가운 누군가를 맞닥뜨릴 거 같은 부질없는 생각. 가끔 반갑지는 않지만 순찰하던 경찰을 만나 검문을 당했다.

'저기 옥상 해바라기 피어있는 곳이 내가 기거하는 곳이요' 손가락으로 친절히 가르쳐 주기도 했다.

검문도 한두 번이지 몇 번을 마주치니까 정말 유기견 보듯 모른 척 지나갔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귀찮은 일도 없어졌다. 무관심하니까 괜히 섭섭해진다.



속마음


그대!

난 그대를 잊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대의 숨결, 그대의 살결, 그대의 흐느낌, 그대의 입술까지 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대는 어디쯤에 있을까.

흘러가는 은하수 따라 엽서 한 장 실은 작은 배 띄워 보내던 불면의 밤들. 

끝내는 그것마저도 바람 불어 침몰할 때, 내일은 그러지 말자 매일매일 다짐도 했어요.

사랑도 허기진 새벽. 

처음 여행 갔던 민박집의 밤처럼, 뜨겁고

숨 막히게 그대를 안고서, 왜 엽서 한 장 없었냐 따지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대

난 그대를 만나지 않을 겁니다.

나의 늦은 첫사랑이었던 그대가

혹시라도, 보고 싶었다 고백이라도 한다면

그대 미워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움과 질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흔하디 흔한 말 부디 행복하세요.


새벽인이른 아침인지 모호한 시간에

그녀와 나누어 꼈던 백금 실반지를 어느 낯선 교회

헌금함에 넣어버렸다.

몇 명의 교인들이 머리를 숙이고 새벽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맨 끄트머리에 앉아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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