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로선 Jul 16. 2024

아버지의 사소한 로맨스



무령 광업소 시장 끝에는 양철지붕을 머리에 이고 몸에는 판자때기를 두른 막걸리 집 춘천옥이 있다.

사계절 선지 해장국과 막걸리만 팔아도 광부들의 발길이 끊어진 적이 없다.



음악교실 춘천옥


노임 받는 날 비까지 내리면 광업소 모든 술꾼들이 일제히 깨어나 목청을 높인다.

줄지어 있는 술집마다 홍도야 울지 마라 젓가락 장단에 굳세어라 금순이가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아버지도 초저녁부터 춘천옥에 있었다.

"춘천옥에 가서 아버지 데리고 오너라 으이구 지겨워 술이 좋은 건지 그년이 좋은 건지."

엄마의 심부름으로 춘천옥에 간다.

신작로의 물먹은 탄가루가 종아리로 튀어 오른다.

멀리서 판잣집 춘천옥이 비에 젖고 있었다.

빗방울들이 음표를 달고 양철지붕으로 떨어졌다가 처마 밑으로 또르르 미끄러졌다. 음표들은 저마다의 리듬으로 천천히 또는 아주 빠르게 도랑 속으로 흘러갔다.

광부들 틈에서 막걸리를 따르던 춘천옥 아줌마가 앞에 있는 주전자를 두드리며 노래를 한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춘천옥이 파도에 출렁거린다.

인사불성으로 떠들던 술꾼들도 음악 시간 학생들처럼 얌전히 앉아 섬마을 선생님을 들었다. 그러다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막장의 고단함을 양재기에 부어 마셨다.


아버지가 노가리를 씹으며 춘천옥을 나선다

춘천옥 아줌마가 배웅한다.

대나무로 만든 퍼런 비닐우산을 들고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혔다. 비 내리는 신작로에는 아버지가 부르는 뽕짝 한 소절이 비틀거렸다.

아버지의 십팔번은 '유정천리'다.


 

춘천옥, 아버지, 그리고 나


춘천옥 아줌마가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엄마에게선 맡을 수 없던 분 냄새도 났고 아이들과 놀 때도 나만 불러서 뽀빠이를 사줬다. 내가 아버지 아들이라서 그런가 보다.

아줌마 말로는 아버지가 최무룡 닮았다고 한다.

사택 벽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를 아무리 봐도 아버지가 최무룡 닮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엔 하얀 손수건에 장미꽃을 수놓아서 아버지 잠바 주머니에 넣어 주기도 했다.

내가 본 모든 것을 엄마에겐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알았다가는 아버지를 붙잡아서 잠을 안재우는 고문이라도 했을 것이다. 공범인 나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 아버지 손잡고 읍내 병원에 갔던 날, 아버지가 양품점에서 브로치 하나를 산다. 우연히 이 모습을 본 복순이 엄마의 신고로 아버지와 엄마가 사택이 시끄러울 정도로 싸웠다. 당장 춘천옥으로 달려가 아줌마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였다.

최무룡 닮은 아버지는 동네 창피하다며 소주 두 병을 마시고는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공범인 나도 엄마의 취조를 받았다.

"병원 갔을 때 아버지가 브로치 사는 거 봤어 못 봤어?"

"봤어."

"봤다고? 이 호랭이가 물어갈 놈이 왜 엄마한테 말 안 했어."

"엄마 건 줄 알았지."

거짓말이다. 여태껏 아버지는 엄마에게 머리핀 하나라도 사준 적이 없다.

"춘천옥 여우가 사주는 과자 먹었어 안 먹었어?"

"안 먹었는데."

두 번째 거짓말이다.

"엄마 쟤 어제도 아줌마가 사주는 박하사탕이랑 카스테라 먹었어."

아홉 살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열두 살 작은누나가 고자질을 한다.

" 이 우라질 놈이 지 애비 닮아서 거짓말이 입에 붙었네. 앞으로 과자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어 처먹으면 집구석에 못 들어올 줄 알아. 알았어?"

"어."

다행히 수수 빗자루로 한 대도 맞지 않고 심문이 끝났다.

최무룡 닮은 아버지는 코를 골다가 몇 번을 숨을 쉬지 않더니 컥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선물


그해 겨울이었다.

까맣던 광산이 하얀 첫눈으로 덮였다.

겨울이면 장사가 더 잘 되는 춘천옥이 웬일인지 며칠째 문을 닫고 있었다.

아버지는 춘천옥 아니면 술맛이 안 나는지 다른 술집은 가지 않고 집에서 두부김치에 막걸리만 마셨다.

보름째 되는 날 춘천옥 아줌마가 막차를 타고 종점에 내렸다.

아줌마가 왔지만 술집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가끔씩 죽은 연탄을 밖에 내놓을 때만 빼고는 춘천옥 아줌마는 두문불출했다.

"춘천옥에 가서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거라

누가 보면 안 된다."

공작금으로 뽀빠이 값 십 원을 받고, 아버지가 내린 특명을 꼭 성공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한다.

엄마가 떠준 방울 달린 모자를 쓰고 춘천옥으로 뛰어간다. 참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볼을 할퀸다. 문을 두드렸다. 얼어붙은 미닫이문이 열리지 않자  발로 몇 번 차 주었다.

가게에 딸려있는 작은방 비키니 옷장에서  이불을 꺼내 덮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삼십 촉 백열등을 켜자 춘천옥 아줌마의 얼굴은 눈처럼 하얗고 핏기가 없었다. 엄마가 말했던 멍든 눈 화장도, 쥐 잡아먹은 빨간 루주도 바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래요."

술집 작부라는 소리를 들어도 당당했던 아줌마는 기운이 없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쉰 목소리로 말한다.

"아줌마가 일이 좀 있어서 서울로 가야 한단다."

뜨거운 아랫목에 얼었던 손발이 녹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대답하지 않고 웃는다.

창문에 바른 문풍지가 파르르 떨었다.

"아버지께 이거 갔다 드려 누가 보면 안 된다."

누가 보면 안 되는 임무가 또 하나 생겼다.

손에 쥐여준 건 지난여름 아버지와 읍내서 샀던 별 보다 더 반짝이는 브로치였다.

"이것도 갖다 드려 아버지 드리려고 하나 샀어."

짙은 밤색 만년필이다. 교장선생님 양복 안주머니에 꽂혀있던 만년필보다 더 좋아 보였다.

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먼 하늘 기러기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괜히 울고 싶어 진다.

"엄마 기다린다 빨리 가"

아줌마가 방울 모자를 씌워주며 등을 밀었다.

그새 문이 얼었는지 또 열리지 않았다.

아줌마가 문을 열어주고는 꼭 안아준다.

더 이상 춘천옥 아줌마에게서 분 냄새는 나지 않았다.



고립


춘천옥 아줌마가 떠난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눈이 내렸다. 아버지도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눈 무게에 못 이겨 춘천옥 양철지붕이 내려앉았다는 쓸쓸한 소식도 들렸다. 하루에 두 번 오는 버스는 하얗게 지워진 길을 찾지 못해 읍내 터미널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올해도 무령 광업소는 세상에서 멀리멀리 격리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막장으로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