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게 내리는 가을비.
떠내려가는 것이 어찌 우산들 뿐이랴.
퇴근길 부유하던 기억 하나 건져 올렸다.
2001.7.3
이 보증금에 그만한 방도 없다는 복덕방 노인의 논리적인 감언이설에 속았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듯하다는 반지하 방.
퇴폐 안마방, 키스방보다 먼저 없어져야 할 방이 반지하 방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루했던 장마가 끝날 무렵 그대의 책장 사이로 검푸르게 피어나던 곰팡이, 그해 여름 카뮈도, 헤세도, 끝내는 하루키마저 곰팡이에 잠식당해 질식해 버렸다. 넘기는 책갈피마다 불어 터진 낱말들, 형광펜으로 줄 쳐놓았던 아름다운 문장들까지 파지 할머니 리어카에 실려가던 날, 눈물 많던 그대는 텅 빈 책장을 보고도 웬일인지 울지 않았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그대가 낯설었었지.
그때부터 그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책 사러 가던 단골 서점엔 가지 않고 도서관 책들을 많이도 읽었다.
"이젠 비가 아무리 내려도 괜찮아, 나라에서 내 책들 지켜주거든."
농담이랍시고 그대가 웃으며 말했을 때
나는 차라리 와이어로프를 목에 걸고 번지점프를 하고 싶더라.
계약기간 남았으니 세입자 구해놓고 나가라는 주인집의 갑질에 무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올 때까지도 그 집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싸락눈 내리던 어느 겨울밤 착하게 생긴 조선족 부부가 방을 보러 왔을 때, 곰팡이가 심하게 핀다고 귀띔해 줬지만 주인이 수리해 준다는 말에 계약을 하더군, 덕분에 우리야 그 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먼 곳에서 꿈을 찾으러 온 선량한 조선족 부부를 생각할 때마다 고구마 먹고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 부디 건강하게 떼돈 벌어서 고향으로 갈 수 있기를 기도했었다.
바다, 모든 기억의 끝
난 비가 내릴 때마다 이상하게, 옛날 달력에서 봤던 카리브해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아주 가까이 와있는 거 같아. 해먹에 누워 뒤척이는 파도를 보면서 칵테일을 마시는 나른한 상상을 하다가, 또는 해저문 광장에서 빠른 비트의 살사를 추는 흑인 노부부의 인생을 상상하다가, 또는 그대와 함께 쿠바의 럭셔리한 클래식카를 타고 오렌지빛 노을이 물든 해변을 드라이브하는 상상을 하다가, 성산포 조차 가본 적 없는 현실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도 지금은 이층에 세 들어 사니까 곰팡이 걱정 안 해도 되고 뭐 이만하면 출세한 것일까.
면 목 없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