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 꾸면 로또 사러 가는 사람들

by 오십둘의 기록

며칠 전 꿈에 돼지가 나왔다.

그것도 아주 실하게 살찐 놈이 마당을 뛰어다니더라. 꿈에서 깨자마자 한 생각이 있었다. '로또 사야겠다.' 이불 차고 일어나서 바지 주머니에 만 원 넣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침 7시 반이었다.

아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요?"

"로또."

"또요?"

그 '또'라는 말에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설명해봤자 잔소리만 돌아온다. 돼지꿈 꿨다고 하면 "그거 미신이에요"라고 할 게 뻔하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다.

로또가 없던 시절에는 복권이 있었다. 주택복권, 올림픽복권 같은 것들. 아버지는 평소에 복권을 사시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돼지꿈을 꾸신 날에는 달랐다. 아침부터 표정이 달라지셨다.

"야, 오늘 아버지 좋은 꿈 꿨다."

그러시면서 점심때 슬쩍 복권 파는 가게에 다녀오셨다. 당첨된 적은... 글쎄, 기억에 없다. 그래도 아버지는 돼지꿈을 꾸면 꼭 복권을 사셨다. 한 번도 안 사고 넘어간 적이 없으셨던 것 같다.

그 습관이 나한테도 왔다.

유전인가. 아니면 그냥 한국 사람 DNA에 새겨진 건가. 돼지꿈 꾸면 로또 사러 가는 건 거의 반사 행동이다. 생각할 것도 없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왜 하필 돼지일까.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돼지는 예로부터 재물을 상징했다고 한다. 돼지 저금통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풍요, 다산, 복. 돼지는 그런 이미지가 있다. 꿈에 돼지가 나오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여기서 나온 거다.

실제로 로또 1등 당첨자들 인터뷰를 보면 돼지꿈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꿈에 돼지가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황금 돼지를 봤습니다", "돼지가 저한테 절을 하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괜히 솔깃해진다. 나도 그런 꿈 꾸면 대박 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물론 냉정하게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돼지꿈 꾸는 사람이 일주일에 몇 명이겠나. 전국에 수만 명은 될 거다. 그중에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오면 그 사람만 인터뷰에 나오는 거다. 안 된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전형적인 생존자 편향이다.

그거 다 안다. 그래도 산다.

편의점에 들어가니 아침부터 로또 줄이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앞에 서 있는 아저씨는 나보다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였다. 자동으로 5장 뽑더니 영수증 꼼꼼히 확인하고 지갑에 넣었다. 그 진지한 표정이 남 일 같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됐다.

"자동 5장이요."

기계가 숫자를 찍어내는 동안 나는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속으로 '제발 이번엔' 하고 빌었다. 미신인 거 안다. 로또가 기도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 몇 초 동안만큼은 진지해진다.

5천 원어치 로또를 받아 들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게 당첨되면 뭐 하지. 일단 대출 갚고, 아이들 용돈 주고, 아내한테 차 바꿔주고... 당첨도 안 됐는데 벌써 머릿속에서 돈을 쓰고 있다.

이게 로또의 진짜 마법이다.

5천 원으로 일주일 동안 꿈을 꾼다. 당첨 발표 전까지는 누구나 45억 부자다. 그 상상만으로도 본전은 뽑는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아내는 로또를 이해 못 한다.

"그 돈 모으면 1년에 얼마예요. 차라리 적금 들어요."

계산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일주일에 5천 원이면 한 달에 2만 원, 1년이면 24만 원이다. 10년이면 240만 원. 로또 당첨 확률은 814만분의 1이라던가. 수학적으로 보면 완전히 손해 보는 게임이다.

그런데 나는 반론한다.

"적금 들어서 45억이 되나?"

물론 아내 말처럼 당첨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적금은 절대 45억이 안 된다. 로또는 된다. 확률이 낮을 뿐이지 0은 아니다. 그 작은 가능성에 5천 원 거는 거다. 나쁘지 않은 투자 아닌가.

아내는 한숨을 쉰다.

"그 논리가 도박꾼 논리예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었다.

사실 로또의 진짜 가치는 당첨이 아니다.

토요일 저녁, 티비 앞에 앉아서 추첨 방송을 보는 그 시간이다. 번호가 하나씩 발표될 때마다 심장이 뛴다. 처음 두 개 맞으면 '오?' 하고, 세 개 맞으면 '설마?' 하고, 네 개 맞으면 손이 떨린다.

그러다 다섯 번째에서 탈락한다.

"아, 아깝다!"

아깝긴 뭐가 아까워. 5등 당첨금이 5천 원인데.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아깝다. '저 번호만 아니었어도', '하나만 더 맞았으면'. 그런 미련이 다음 주 로또를 사게 만든다.

가끔 5등에 당첨되면 기분이 묘하다.

본전이다. 들인 돈 그대로 돌려받는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나 이번 주 로또 당첨됐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5천 원이어도 당첨은 당첨이다.

돼지꿈 말고도 로또 사게 만드는 꿈들이 있다.

조상님이 나와서 숫자를 알려주는 꿈,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 똥 밟는 꿈, 이빨 빠지는 꿈... 이빨 빠지는 건 원래 안 좋은 꿈 아닌가? 그런데 로또 커뮤니티 가보면 이빨 빠지고 1등 됐다는 사람도 있다.

결국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로또를 산다.

인간의 희망 회로는 위대하다. 어떤 꿈이든 당첨의 조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돼지가 나오면 재물이고, 불이 나면 불티나게 팔리는 거고, 물에 빠지면 돈에 빠지는 거라고. 말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인생에 이런 작은 미신쯤은 있어야 재미있지 않나.

당첨되면 뭐 할 거냐고?

이 질문은 로또 사는 사람들의 영원한 주제다. 술자리에서도 이 얘기만 나오면 다들 신이 난다. 저마다 계획이 있다. 집 사겠다, 여행 가겠다, 회사 때려치우겠다.

나는 좀 다르다.

당첨되면 일단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다. 조용히 받아서 조용히 굴릴 거다. 그러다 슬쩍 이사하고, 슬쩍 차 바꾸고, 슬쩍 여행 다니고. 티 안 나게 살 거다. 로또 당첨됐다고 소문나면 인생 피곤해진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 친척들 찾아오고, 친구들 손 벌리고. 그런 거 싫다.

근데 이런 계획 세우는 것도 웃기다.

당첨도 안 됐는데 벌써 걱정이다. 인간은 참 희한하다. 없는 돈 걱정을 미리 하고 있으니.

오늘도 지갑에 로또가 들어있다.

당첨 발표는 토요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45억 부자다. 아니, 정확히는 45억 부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 가능성을 품고 사는 일주일이 나쁘지 않다.

돼지꿈 덕분에 시작된 한 주다.

당첨되면 돼지 인형이라도 사놔야겠다. 안 되면? 안 되면 다음 돼지꿈을 기다리면 된다. 꿈은 또 꾸면 되니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물었다. "자동이요, 수동이요?"

"자동이요."

숫자 고르는 건 하늘에 맡긴다. 어차피 내가 뭘 알겠나. 돼지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래도 오늘은 왠지 될 것 같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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