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벗으세요.”
입국 심사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모자를 벗어야 되는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발머리였는 데 암투병 중이라 항암주사로 한올도 남김없이 빠져버렸다. 긴장 가득한 얼굴로 노란색 창모자를 엉거주춤 벗으며 심사대를 통과했다. 회사동료이자 병원 동기생까지 된 친한 언니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괜...... 괜찮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가야처럼 고개를 까딱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온 여행이라서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동료로 만난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욱 친하게 지냈다. 특히나 술을 좋아하는 우린 퇴근 후 날씨가 좋아서 한잔, 비가 와서 한잔, 일이 안 돼서 한잔, 기분 좋아서 한잔 늘 술과 함께 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일도 함께 겪게 되었다.
"언니! 퇴근하고 뒷고기에 한잔 어때?"
"아니 술 생각 없어."
술을 거부한다는 것은 아프거나 뭔 일이 있다는 촉이 왔다.
결국 언니는 강남세브란스에서 로봇수술로 갑상선암 수술을 하게 되었고 술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도 같은 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우린 술동기에서 암요양병원 동기가 되었다. 나는 항암치료 중이라서 탈모가 되었을 때 언니가 옆에 있어줘서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그때 나도 누군가 힘들어할 때 어떤 말보다 함께 있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에서 암환자로 익숙한 생활로 길들여지고 있었다. 언니랑 나는 어디로 놀러 갈지 여행계획을 세우며 희망을 가졌었다. 생각해 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참으로 많이도 미루며 살았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살자고 말하는 순간 언니는
"다음 주 금요일 비행기시간 알아보고 떠나자. 어때?"
1초의 망설임 없이
"오케이! 가자. 어디든 떠나자."
우리는 이미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고 있었다.
차근차근 은밀한 여행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항암 치료 중이라서 체력이 안되니깐 하루 세 번 식사 후 황토맨발 걷기를 했다. 가장 크게 신경 써야 하는 머리는 더운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시원한 마소재의 모자를 구입했다. 가족들과 병원에는 여행 간다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깐 병원은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한다고 말하면 되고 집에는 항암주사 맞으러 병원 갔다가 경기도에 사는 친구집에서 며칠 있다가 온다고 말하기로 했다. 남편이랑 친정식구들도 아는 친구라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 가고, 우리는 본격적인 여행에 들어갔다.
언니와 나는 단짝 친구처럼 흰색 반바지에 상의는 초록색으로 가방도 맞춰서 준비했다. 난 복숭아, 언니는 딸기가 그려진 잠옷도 맞췄다. 50대인 아줌마가 '설레임'이 어떤 건지 다시 느끼는 이 기분은 뭐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린 드디어 기대감 가득 안은 채 김해공항에 왔다. 비록 입국심사 때 난감한 상황이 있었지만 일본에 잘 도착을 했다.
가이드님께서 유후인 킨린호수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시며
"두 분이 드레스코드 맞추신 거예요?"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처럼 우린 동시에
"네"라고 대답했다.
칭찬을 듣고 더욱 신나서 자유시간 동안 사진을 많이 찍었다. 우리는 유명한 금상크로켓도 사 먹고 귀걸이도 사고 캐릭터 소품샵도 재미있게 구경했다. 관광 후 숙소로 들어왔다. 다디미방이어서 일본 온 게 더욱 실감이 났다.
언니와 나는 주변에 뭐가 있는지 나갔다가 저녁노을을 보게 되었다. 저녁 여덟 시면 우리는 치료받고 하루 잘 보낸 안도감에 병실에 누워서 잘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같은 시간대에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나 자유스럽고 행복한 기분이었는지 그 순간 언니와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자유와 행복감을 가득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함께 바라본 노을은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숙소로 들어와서 귀여운 잠옷 입고 낮에 찍은 사진들을 보며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다. 몰래 온 여행이라서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사진들이지만 우리 둘 만 공유할 수 있는 사진이라서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게 될 것이다.
꿈같던 일본여행을 마치고가 모든 것이 마법이 풀린 듯 우리는 일상으로 슝하고 돌아왔다. 매일같이 건강식단으로 시간 맞춰 밥 먹고 치료받고 우린 다시 착한 환자로 돌아왔다. 저녁 여덟 시가 되면 잠잘 준비를 하며 하루를 마친다. 하지만 우리 가슴속에는 저녁노을을 마음에 품고 설렘으로 잠이 들 것이다.
우린 또 다른 일탈을 꿈꾸며 어디로 여행을 갈지 계획을 세우고 곧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