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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옹 Aug 12. 2024

02. 여행하는 선생님

01. 도서산간 교육봉사를 다니던 대학생은 왜 서울 교사가 되었는가?

한창 동아리 활동을 하던 당시, 코로나가 창궐해서 자금이나, 함께하는 사람이나, 프로그램의 진행이나 모든게 비상상황이었던 때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한 워크샵이, 수업이, 여행이 시작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어쩌다 간 여행은 도착하자마자 취소가 되던 사례도 있었다. 그렇게 무기력감이 쌓여갔고, 운영진 사이에서도 갈등이 번졌다. 하필이면 대부분의 운영진이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을 쯤이었고, 모두가 이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나와 그리고 교육팀 2명 말고는 모두가 동아리를 나갔다. 그 땐, 이런 상황이 버거워 마치 소녀가장이 된 듯, 뭐라도 해보자 하며 이것저것 지원사업도 건드려보고, 홍보자료도 만들며 내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았던 것 같다. 지금은 사회에 찌들어 그런 열정이 생기지 않아 가끔은 그렇게 몰입하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보면, ‘여행하는 선생님들’ 이라는 단체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도서산간으로 교육봉사를 가는 단체’다. 그런 단체에 대학생활을 다 갈아 넣었던 나는 그럼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지역을 선택할 때 당연히 도서산간 지역에 가야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게 지역격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다양한 기업에게 피티 준비를 했으면 당연히 도서산간 지역을 가서 조금이라도 지역격차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하는게 당연한 수순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 '여행하는 선생님들'이라서 가능한 일

 여쌤이 대상으로 하는 학생들은 ‘고등학생’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사실 여쌤에서 했던 일과 지금 하는 일의 대상은 같으나, 느끼는 점과 태도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사실 상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입시와 직결되어 있는만큼, 아이들에게 당장 중요한건 입시 상담과 교과 내용이다. 물론 상담을 하며 곁다리로 다양한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여쌤에서 하던걸 내가 아이들과 한다면 아마 ‘한가한 소리 하지 말라’며 민원이 들어올 수도 있다.


 발령 받고 첫해, 그나마 입시에 부담이 좀 덜한 과목을 맡게된 적이 있다. 그 때, 수석선생님께서 ‘생각을 쓰는 교실’사업을 해보지 않겠냐며 제안을 주셨고, 나는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생각을 쓰는 교실’은 서울시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사업인데, 수업모델인 ‘질문하기-탐구하기-쓰기’과정으로 교과 수업을 이끌어 나가는 수업모델이다. 이 과정이 여쌤식의 ‘퍼실리테이션’과 접목하기 쉬워서 임용 준비 때부터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터라, 너무 좋은 기회다 싶어 진행하게 되었다. 포스트잇을 이용한 퍼실리테이션을 수업에서 진행했는데, 여쌤의 수업에서는 대학생들이 모둠에 한명씩 들어가 퍼실리테이터가 되어주었지만, 실제 수업 현장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학생이 없었다. 모둠별로 지정은 해주었지만, 연습이 안되어 있던 터라 결국 나 혼자 계속 돌아다니며 모든 모둠의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되었다. 그것을 약 6차시, 6반을 하고나니 솔직히 현타가 왔다. 지친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아이들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그냥 내 자기만족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중요한건 당장의 시험과 수능이니 말이다.


 여쌤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여쌤이라 가능한 수업이다.


- 도서산간이 중요한건 아니다.

 모든 아이들, 사람은 방황을 한다. 내가 교육 팀장이었던 시절, 내가 만든 테마는 ‘사춘기;네번의 봄을 기록하다’라는 테마였다. 당시 대학생이지만 때늦은 거한 사춘기가 찾아와버린 탓에 여러모로 많이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어떤 태도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행복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땐 정말 기를 쓰고 살았는데, 그렇게 살아야만 내가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삶에 그런 시기는 찾아온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견뎌내고, 삶의 방향성을 찾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방황은 일종의 시작을 의미하는 ‘봄’이다. 라는 의미를 담았던 것 같다.

 현재 교직 현장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많이 본다. 방황을 하는 학생들, 그리고 잘 견뎌내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여쌤이 말하는 것이 도서산간이 중요한게 아니구나 생각한다.

그냥 사람이면 다 필요한 거구나 생각한다.


- 그래서 왜 서울갔냐고

 별 이유는 없다. 어차피 내가 학교를 정할 수는 없다. 내가 서울로 정한 이유는 당시의 지역별 티오, 내 실력(떨어지면 서울써서 떨어졌다고 하려고 했다.), 그리고 막연한 서울살이에 대한 로망이 작용했던 것 같다. 다만 내 결정의 요소중에 ‘여쌤’에서의 기억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지나간 기억은 지나갔기에 아름다울 때도 있는 것이다. 대학생이기에, 일주일이기에, 봉사이기에 가능했던 아름다운 기억은 그 때 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직업으로, 일년동안 30명의 아이들의 담임이 되는 것과는 별개인 것이다. 그저 지금은 내 자리에서 내가 맡게된 아이들과 하루하루 조금은 힘들고, 조금은 행복한 안정적인 일상을 살아내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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