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살면서 한꺼번에 여러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멀티태스킹이 어려운 나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늘 벅찼다.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고, 어쩔 수 없이 ‘열심히’는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선택이 아닌 생존 방식이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버티며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인내와 끈기는 습관처럼 배어들어 어느새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익숙한 버팀이 오히려 나를 옭아매는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멀리 달리기 위해 멈추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숨이 차오를 때마다 괜찮은 척했고, 방향을 잃은 채로도 계속 걸었다. 그러다 몸이 이상 증상을 보였고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내 것 같지 않게 느껴지던 어느 날, 나는 문득 나를 찾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에서 한 발 물러서, 숨을 고르고 온전히 나를 마주하기 위해 길 위에 섰다. 정해진 시간표도, 계획된 일정도 없이 발길이 멈추는 곳에 서고,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해에서 시작해 광양, 하동, 여수, 고흥까지, 다섯 도시를 걸으며 나를 돌아보고 싶었다. 풍경 속에 오래 머물고, 바람 앞에 말없이 앉아, 필요 없는 말 대신 깊은 침묵에 더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낯선 길 위에서야 비로소 가장 깊은 곳의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지도를 펴고 선을 그었고, 그 선은 곧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길이 되었다. 내가 놓친 풍경을 그는 카메라로 담았고, 나는 그가 지나친 마음을 글로 붙잡았다.
때로는 말없이 걷고, 때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걷고 머무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중요한 건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어떻게 걷고 있느냐였다.
이 책은 정보를 담은 기록이 아니라, 나를 되돌아보고 서로를 다시 바라본 시간의 흔적이다. 분주한 일상에 휩쓸려 잊고 지냈던 마음의 결들을 다시 어루만진 느린 여정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당신에게 건넨다.
혹시 지금, 당신도 숨이 차다면, 이 책이 잠시 쉬어갈 쉼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삶이란 끝없이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마음을 건네며 함께 걸어가는 길이다.
그래서 이 글이 스쳐 가는 바람이 아니라, 잠시 머물러 마음을 식히는 그늘이 되길 바란다. 바쁜 하루의 틈새에서, 문득 이 글을 펼쳤을 때 당신의 걸음이 조금 느려지고, 그 느림 속에서 잊고 지냈던 당신의 온기를 다시 만난다면 좋겠다. 그렇게 당신의 하루에도 한 줄기 따뜻한 바람이 머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