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며
출발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다. 출퇴근 시간을 피해 아홉 시에 출발하자고 했지만, 여덟 시가 넘도록 우리는 짐을 챙기지도 않은 채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떠나면서 이렇게 준비를 안 해도 되나 싶을 만큼 둘 다 느긋했다.
혼자 있을 아들을 위해 어젯밤에 끓여놓은 김치찌개에 다시 한 번 불을 올렸다. 김치찌개는 내가 집을 비울 때마다 꺼내 드는 단골 메뉴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밥에 찌개 한 국자면 든든한 한 끼가 되니 이만한 것도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김치찌개였다. 어제저녁에 김치를 썰고 있는 내게 다가와 남편은 무심한 듯 한마디를 휙 던지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말.
이제는 그냥 웃음부터 난다. 목성의 띠처럼 두툼하게 배를 감싸고 있는 배 둘레 햄은 어쩌려고 저리도 고기에 집착하는 것인지, 고기에 대한 집착은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결같다. 아침, 점심, 저녁, 고기가 발 씻고 지나갈 정도라도 매번 고기반찬을 상 위에 올렸건만, 늘 단백질 부족이라며 징징대는 그이다. 갈비로 배를 채우고도 갈비탕으로 입가심하는 사람, 그의 고기 사랑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옜다. 기분이다. 평소의 두 배나 되는 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김치와 함께 달달 볶다가 물을 부었다. 그리고 동전 육수 한 알을 털어 넣었다. 이젠 뚜껑을 닫고 고기와 김치가 익을 정도로 푹 끓이면 끝이다.
참 살기 편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집 부엌에서는 매일 육수 끓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나는 요리할 때마다 멸치와 다시마, 무, 표고버섯을 넣고 육수부터 끓였다. 소고기뭇국이나 김치찌개는 물론 오이 냉국이나 계란찜, 심지어 전을 부칠 때도 늘 육수를 사용했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족을 위한 나의 정성이라고 스스로 단정했다.
아이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했던 이 말이 언젠가부터 내 입에서 사라졌다. 힘들게 육수를 끓이지 않아도 맛있게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그 편리함에 서서히 길들여졌다. 비닐봉지만 뜯어 동전만 한 육수를 넣었을 뿐인데 내가 끓여낸 육수와 같은 맛이 났다. 그 작은 것의 신기함을 알게 된 이후로 우리 부엌에서는 더 이상 육수 끓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딴전 피울 시간이 없었다. 떠날 시간이 거의 되어서야 부랴부랴 각자 짐을 쌌다. 빨래가 마르지 않을 것을 대비해 속옷과 양말은 충분히 챙기고 겉옷은 딱 세 벌만 넣었다. 두 사람의 여행 짐으로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패션쇼를 하듯 매일 옷을 갈아입었을 터였다. 여행지에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진 속에 남을 모습까지 계산하며 옷의 색을 맞추고 옷깃을 고쳐 매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내게 관심을 가질 사람도 아무도 없다. 여행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멋이 아니라 편안함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동안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내 삶을 덕지덕지 누더기로 기워놓고 있었다. 이성과 현실 속에서 매일 헤엄치듯 살아오던 나를 내려놓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
가벼워진 건 캐리어뿐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함께 비워지고 있었다. 짐도, 생각도, 기대도 조금씩 덜어내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TV에서는 영하 12도, 체감온도 영하 19도로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하필 이런 날에 떠나다니…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하늘은 맑았다.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수놓고 구름 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민 햇살이 더할 나위 없이 정겨웠다. 왠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에 마음이 설레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물었다.
고개를 돌려 말하는 그의 얼굴 위로 따스한 햇살이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나도 베리베리 굿이다. 비록 완벽한 준비는 안 했어도 마음만은 여유와 낭만으로 가득 채웠다. 가방은 가볍고
발걸음도 느긋했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가수 나훈아의 노래 ‘공’이 흘러나왔다. 평소 좋아해서 자주 흥얼거리던 멜로디였다.
그 노랫말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1시간 듣기를 켜고 반복해서 들을수록, 나에게 주는 교훈 같았다. 눈앞의 이익만 좇느라 중요한 것들을 놓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부리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삶은 붙잡는 일보다 내려놓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비워낼 때에야 비로소 진짜 내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느꼈다. 버린다는 건 단순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진짜 소중한 것만을 남기는 것이었다. 나를 짓누르던 불필요한 것들을 비워낼 때 오히려 더 단단하게 채워지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걸,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삶에서 한 걸음 비켜 나, 조금은 느슨해져도 괜찮다고, 조금은 비워도 괜찮다고 내게 말해주고 싶었다.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일상에서 한 걸음만 벗어났을 뿐인데, 아무것도 안 해도 그저 웃음이 났다.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설레고 행복했다.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이 길이 조금은 더 단단하게, 조금은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 하나가 우리의 길을 이끌었다.
전라도로 접어들자 톤 다운된 풍경이 서서히 눈앞에 다가왔다. 눈 덮인 산들은 침묵 속에서 묵직한 위엄을 드러냈다.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모습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 속에서, 눈은 모든 소리를 삼킨 듯했고, 산들은 고고한 선비처럼 말이 없었다. 그 위엄과 정적 속에서 나는 묘한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차가 달리는 동안 마음도 점점 더 차분해졌다. 눈 덮인 산처럼 내 안의 소란스러움도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어느새 경상도로 접어들었다. 작은 나라임에도 날씨의 변화는 놀라울 만큼 뚜렷했다. 눈으로 덮였던 풍경은 자취를 감추고 맑은 하늘 아래, 포근한 구름이 병풍처럼 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전라도의 고요한 정적이 지나가자, 경상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구름은 산자락을 감돌았고 틈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능선을 따라 금빛으로 번졌다. 차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평화로우면서도 장엄했다.
진주통영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던 자동차는 다섯 시간 반 만에 남해 독일마을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러 물을 사고 따뜻한 국밥으로 속을 채웠다. 남편은 늘 그랬듯 규정 속도를 지키며 조심스레 운전했다. 급하게 가면 더 빨리 도착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서로의 걸음을 맞추며 천천히 걷는 길, 빠르지 않아도 함께 가는 길이면 충분했다.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그리고 진짜 우리를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