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아침은, 조금 느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만한

by 우먼파워

"여보, 나 주름 좀 펴줘요.”


겨우 눈을 떴을 뿐인데, 나는 또 주름 얘기로 낯선 도시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밖은 이미 아침 빛이 가득할 테지만, 두꺼운 커튼을 친 방 안은 여전히 컴컴한 밤의 잔영을 드리운 채 잠잠했다. 정적이 감도는 숙소 안, 머리맡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7시 42분. 늦게까지 잤더니 피로가 모두 풀린 듯 몸이 한결 가뿐했다.

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오늘도 아무 계획이 없었다. 어디를 갈지, 뭘 할지도 모르는 하루가 밝아오고 있었다. 그저 이불속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블로그에 들러 댓글을 달고, 브런치에 새 글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느긋함이 좋았다.


그때 그가 눈을 떴다. 잠에서 깬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TV에서는 마침 겨울철 피부 관리와 수분, 콜라겐에 관한 건강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여보, 나 주름 좀 펴줘요.”


나는 주름 이야기부터 꺼냈다.

자는 척을 하는지 그는 말이 없었다.


“나 주름 좀 펴달라고.”


그제야 이불 속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그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또 그 소리야. 무슨 주름이 있다고 그래.”

“빤한 틈 없이 여기도 주름, 요기도 주름, 온 얼굴에 주름 투성이잖아. 자기 안경 써야겠어요.”


낯선 도시의 아침, 나는 여전히 집에서처럼 주름 타령을 하고 있었다. 그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나는 눈 밑 지방 좀 제거하고 싶어요. 요즘 그게 너무 신경 쓰여.”


참나. 내 주름은 안 보인다더니, 본인 눈 밑은 그렇게 거슬린단다.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쯤 되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거울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를 통해 늙어가는 나를 확인하고, 그는 내 앞에서 자신의 세월을 자각한다. 깊게 패인 주름골을 볼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이 밀려온다. 삶의 깊이라 부르기엔 너무 무거운 흔적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세월의 무게를 함께 느낀다. 가끔은 거울보다 더 정직한 존재가 바로 옆 사람일 때가 있다.


여수의 낯선 숙소에서 우리는 나이 타령, 주름 타령을 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불평이든 농담이든 상관없었다. 이렇게 편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겐 소중한 일상이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카페로 향했다. 검색창에 몇 글자만 입력했을 뿐인데 우리가 원하는 정보들이 주르룩 올라왔다. 망설임 없이 가장 위에 뜬 곳을 골랐다. 관심 없는 척했지만, 나 역시 SNS 정보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감성적인 사진 한 장에 마음이 기울고, 짧은 해시태그 몇 개에 방향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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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도착하자 입이 떡 벌어졌다. 산을 깎아 세운 듯한 압도적인 규모, 수백 대의 주차 공간, 4층 높이의 건물은, 바다를 품은 거대한 미술관 같았다. 층마다 다른 분위기로 연출된 인테리어, 그림처럼 걸린 창밖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좌석이 하나의 액자 속에 놓인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무슬목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C자형 몽돌 해변이 부드럽게 휘돌아가며, 양옆으로는 고깔처럼 머리를 내민 섬들이 병풍을 치고 있었다. 어디에 앉든 작품이 되고 주인공이 되었다. 그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 자리를 옮겨가며 바다를 눈에 담았다.

시그니처 메뉴인 라떼 두 잔을 시켰다. 부드러운 크림 위에 쑥 향과 바다의 이미지를 담은 듯했다. 한 모금 마시자 오감이 열리고 마음까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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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로 나가자 푸른 물결 위로 햇살이 스쳤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다를 즐기는 중이었다. 친구들끼리 깔깔대며 사진을 찍는 무리, 서로의 어깨에 기대 앉은 연인들, 그리고 나처럼 그 풍경에 넋을 놓은 사람까지 모두가 순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특별한 목적도, 정해진 계획도 없이 그저 마음이 닿는 대로 걷고 머물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로움 안에서 비로소 이번 여행은 더욱 여행다워졌다. 시간이 멈추길, 이 순간이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충만한 시간, 빠르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채우던 일상과는 전혀 다른 결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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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바라는 건,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었다. 바다는 내게,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늦추고, 생각을 비우고, 마음 가는 대로 머무를 때, 진짜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나의 깊은 내면을 발견하는 방법은 역시,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나였다.

그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내일 면접을 보러 오라는 메시지였다. 떠나기 며칠 전 제출했던 취업지원서의 서류 합격 통보였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하필 이때? 그것도 내일 면접이라니? 면접을 보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기다리던 기회였지만, 지금의 이 여행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내일 면접 보러 오라고 문자 받은 사람인데요. 제가 지금 여행 중이라 면접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오히려 후련했다. 잠깐이지만 양손에 쥐고 재던 무게를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바람과 햇살, 파도의 속삭임이 그대로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중에 후회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 지금은 현재에 집중하며 온전히 즐기는 것이 중요했다.


오늘의 나는 바다 앞에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여행이란 결국 속도를 잊고,판단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를 마주하는 시간임을 깨달았다. 때로는 떠나고, 때로는 머무르며, 그 순간순간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이자,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나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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