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끝에서 나를 만나다

오마도

by 우먼파워

길을 떠날 때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과 마주하게 된다. 흔히 여행이라 하면 낭만과 설렘을 떠올리지만, 때로는 그 길 위에서 씻기지 않는 상처 같은 역사와 조우하기도 한다. 전남 고흥의 끝자락에 있는 오마도 간척지 역시 그런 기억이 쌓인 곳이었다.


다섯 개의 섬이 말(馬)의 모습을 닮아 오마도(五馬島)라 불리는 이곳은 한센인들이 새 삶의 터전을 일구고자 맨손으로 일군 땅이었다. 바다를 등지고 당당히 서 있는 다섯 마리의 말 동상은, 그들의 희망과 용기의 상징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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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도의 바다는 그들의 땀과 눈물로 메워졌다. 이천여 명의 한센병 음성 환자들이 손으로 흙을 퍼 나르고 바다의 조류와 맞서며 간척지를 만들었다. 수심 팔 미터가 넘는 바다에 대나무 사다리를 박아도 다음날이면 휩쓸려 사라졌다. 퍼 나르고 또 퍼 나른 흙더미는 거센 조류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고, 부상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을 잃는 일도 잦았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일어섰다. 이 땅은 절망 끝에 붙잡은 마지막 희망이었으므로, 아픈 몸을 이끌고 손수레를 밀며, 그들은 삶을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토록 간절했던 희망은 끝내 외면당하고 말았다. 새로운 삶을 꿈꿨던 그들에게 허락된 건, 직접 일군 땅에서 내몰려야 했던 현실이었다.

추모 공원 한켠, 낡은 조각 글귀가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오천 원생은 곡하노라. 세계적인 대 기만극으로 막을 내렸기에 여기에 그 유래를 새겨 만천하에 고하노라.’

그 문장은 한 시대의 비극을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억눌린 울음이자 마지막 호소처럼 들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그 절망은 아직도 바람결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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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관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빛바랜 프레임 속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굳게 다문 의지와 꺾이지 않는 생의 기운이 배어 있었다. 맨손으로 바위를 들어 올리고, 작은 배에 몸을 실은 채 간척지로 나아가던 모습들. 그들의 표정은 고통보다도 살아내겠다는 결기에 가까웠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의 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외면당한 땅, 고흥 오마도 간척지. 하지만 그 땅은 여전히 계절을 품고, 묵묵히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그 너머로 잔잔히 출렁이는 바다는 무심한 듯 모든 것을 감싸안고 있었다. 추모 공원을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눈앞에 조용히 놓인 조각상들, 고단한 삶의 순간을 고스란히 품은 몸짓들이었다. 병든 몸으로 삽 하나에 의지해 바다를 메워야 했던 사람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던 시간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결국 빼앗기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저 한 장의 풍경으로 흘려보래기엔, 이곳에 깃든 삶의 무게가 너무 크고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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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도 간척지는 단순한 지나침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깊고 오래된 상흔을 품은 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아픔 속에서도 끝끝내 삶을 일구려 했던 사람들의 의지를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먼바다 위로 찬란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저 빛 속에 언젠가 이곳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겪었던 아픔이 외면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랐다. 나는 그들의 희망이 무너졌던 곳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꿈꿨던 사람들의 강인한 마음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이 여행이 단지 지도를 따라 움직인 발걸음이 아님을 깨달았다. 일과 책임에 얽매였던 일상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를 다시 불러보는 여정이었다. 빠르게 달려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날들 사이로, 조용히 나만의 속도를 되찾는 시간이었고, 그 안에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조율해 보는 소중한 전환점이었다. 남해의 바람과 파도, 그 속에 살아 숨 쉬던 이야기들이 내 마음에 작은 쉼표를 찍었다. 그 쉼표 위에 잠시 서서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제는 조금 느리더라도, 더 단단하게, 나답게 살아가겠노라고.


이 여정의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도 위의 길이 아닌, 내 마음이 그린 길을 따라, 나는 나만의 속도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 마주할 날들에도 이 느린 발걸음이 나를 잃지 않게 지켜주리라 조용히 믿어본다.

결국 여행의 목적지는 다 다를지라도 되돌아오는 곳은 한 곳이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다 다를지라도 결국 되돌아오는 곳은 한 곳이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에게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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