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의 자몽

H식품관을 사랑하는 이모의 수입과일 컬렉션

by 유진리

내 하나뿐인 이모는 서울 토박이다. 이모부가 지방에 파견 가 대구에서만 몇 년 지냈지, 이모는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다. 이모 집의 재정상황은 풀리지 않는 몇 대 미스테리 중 하나였다. 이유는 이모 집에서 먹는 데 쓰는 돈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내 느낌에 이모 집의 수입은 자녀 교육비가 아니면 모두 식비로 들어갔다. 이모부는 공무원, 이모는 전업주부였는데 이모 집엔 언제나 수입과일이 있었다. 오렌지랑 자몽, 키위, 파인애플, 망고 뭐 그런 류인데, 지금은 많이 흔해졌지만 당시에는 자주 먹지 않는 열대 과일들이었다. 이 수입과일들은 모두 H백화점 출신이었다.


어린이 입맛에는 맛이 있으려다가 없어지는 쓴 맛 자몽과 통조림으로만 주로 먹어본 파인애플, 크고 나서야 흔해진 오렌지가 이모 집엔 많았다. 엄마가 무슨 과일을 백화점에서 사냐고 “넌 참 돈도 많다” 타박하면, 이모는 백화점 과일이 크고 맛있으니 비싼 것도 아니라며 싱긋 웃었다. 그땐 정말 이모가 사치스럽나 했는데, 이모는 지방에서 어쩌다 한 번씩 놀러오는 동생에게 주려고 그 땡볕에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백화점 식품관에 갔다 온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이모는 과일은 역시 백화점에서 사야한다고 경쾌하게 답했다.)


이모 집에서는 소고기도 한우를 주로 먹었다. 이모는 뷔페도 좋아해서 그 집의 모든 가족 행사는 집 근처 뷔페 식당에서 치렀다. 이모 찬스로 뷔페에 갔던 대학생 나와 동생이 세 접시 만에 나가떨어지자, 이모는 조카들의 작은 위장을 나무랐다. 이모는 “소화제를 준비해왔으니, 조금 쉬었다 또 먹어라”라고 다정하게 독려했다. 이모는 손이 컸고, 이모 가족은 화답하듯 잘 먹었다. 이모 집에는 아파트 상가에서 사온 별미들이 냉동실 가득 들어있었다.


이모는 조카인 동생과 나를 무척 예뻐했지만, 최소 며칠 전 예고하지 않고는 그 집에 절대 갈 수 없었다. 이유인즉슨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 말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이모는 인생의 우선순위가 명확한 사람이라 집 청소나 정리는 뒤로 미뤄두는 편이었다. 이모 집에는 방이 세 개 있었지만 대부분 거실만 개방했다. 역시 이유는 “거실에 엉덩이 붙일 자리를 만드느라 온갖 잡동사니들을 방에 처박아 뒀기 때문”이었는데, 이 역시 사실이었다. 자취하던 조카들이 이모 집에 오면 이모는 반찬을 이것저것 담은 타파통을 커다란 비닐백에(대부분 H백화점 식품관 봉투였다) 담아 우리에게 들려 보냈다. 집에 오면 봉투가 너무 무거워 손바닥에 빨갛게 자국이 났다.


얼마 전 외할머니의 산소에 벌초 겸 성묘를 다녀왔다. 시커먼 산모기 떼가 손부채질을 뚫고 오만 데 달라붙었다. 빨리 끝내고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은데, 이모가 커다란 가방에서 음식을 잔뜩 꺼냈다. 새빨간 수박 반통과 배와 참외가 나오고, 그 다음엔 찐 고구마랑 삶은 계란, 삶은 밤까지 비닐봉지가 끝없이 나왔다. “식당에 가서 풀지 여기서 이러냐”, “한 두 개만 꺼내지 이걸 누가 먹냐”는 이모부와 엄마의 구박에도 이모는 꿋꿋이 준비한 모든 음식을 돗자리에 다 펼치고, 수박을 석석 썰었다. 이모는 “다 우리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이라며 모두에게 수박과 참외와 배를 건넸고, 모두가 외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었다. 수박은 정말 달았고, 밤은 속이 꽉 찼고, 고구마도 맛있었다. 이모는 정말로 먹는 데 진심이다. 이모를 닮아 먹는 데 진심인 나는 이모랑 오래 오래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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