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스팸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맛

by 유진리


아들이 추석이라고 학교에서 ‘추석선물세트’를 만들어왔다. 색도화지 가방 안에 종이로 그린 스팸이랑 식용유, 망고가 들었다. 아들이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내 동생도 좋아하는 스팸사랑은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


나의 외할머니는 아주 마른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북한에서 내려와 친척이 별로 없었다. 남자 형제들이 자리를 잡았던 용산에 오래 사셨고, 두 딸이 출가한 이후에는 서울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주공아파트에 혼자 사셨다.

외할머니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내가 어릴 적엔 엄마가 운전을 안 했다. 나와 두 살 터울인 동생을 데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오기는 쉽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집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기억나는 몇 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유리가 달린 장식장에 놓였던 못난이 울보 양배추 인형 삼형제가 머리가 얼마나 꼬불꼬불했나 그런 것들이다. 레이스 장식이 있는 자수 테이블보나 소파 커버 같은 것도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스팸이 있었다. 야채를 안 먹는 외손주들 반찬을 만들어주려고 그러셨는지, 갈 때마다 스팸 통조림이 많았다. 이상하게도 외할머니와 같이 밥 먹은 기억은 안 나고, 그 집에 스팸이 많았다는 기억만 또렷하다.


사진 속 외할머니는 갓 태어난 빨간 얼굴의 나를 안고 있고, 결혼하기 전 인사 온 군복차림의 이모부와 함께 소파에 앉아있고, 걸은 지 얼마 안 되는 주제에 서서 그네 타기를 좋아했던 꼬맹이 나를 놀이터에서 지켜보고 있다.

젊은 엄마는 살림하랴 육아하랴 바빠 내가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많이 만들 만큼 친정에 자주 왕래하지 못했고, 외할머니 역시 딸 집에 잘 오시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막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췌장암이었다. 발견이 늦어 진단을 받은 지 얼마 안 돼 돌아가셨다고, 수십 년 뒤에야 아빠에게 전해 들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가 입었던 상복과, 새까만 머리에 한참 꽂고 있었던 흰색 리본 핀은 기억난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식탁에 앉은 엄마가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라서, 어린 나는 엄마가 저렇게 계속 슬프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스러웠다. 엄마는 집에 있었지만, 몸만 있었다. 외할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묻지 못한 것도, 엄마가 여전히 슬플 것 같아 입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여기저기서 듣고 조각조각 맞춰보는 외할머니의 서울 살이는 참 쉽지 않았겠다 싶다. 별다른 수입이 없이 집세만으로 생활비 쓰고 두 딸 학비 대기는 빠듯했을 것이다. 애를 키우면 도움 받아야 할 일이 많은데, 말수가 적던 외할머니가 누구를 가깝게 막 사귀었을 것 같지 않다. 외할머니와 이모와 엄마가 혹시라도 전쟁이 나면 지하철 시청역에서 만나자고 약속해뒀다는 말로 봐서는, 외할머니는 태평한 성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느지막이 결혼한 첫째 딸이 바로 아들을 낳지 못해 시집 눈치를 볼까봐, 사위 따라 지방 간 둘째 딸이 친정 도움도 못 받고 혼자 애들을 키우느라 힘들까봐 늘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어딜 가든 “이렇게 큰 딸이 있는 줄 몰랐다”는 얘기를 듣던 외할머니의 둘째 딸, 나의 엄마도 외할머니가 되었다. 내 아이도 나중에 나처럼 외할머니를 떠올리겠지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온다. 할머니가 팔이 저릴 때까지 어린 너를 안고 재운 것도, 엄마와 할머니가 목이 아플 때까지 동요 메들리를 불러준 것도, 네가 좋아하는 망고를 때마다 보내 주고 반찬투정을 하는 너에게 1식 3찬을 채워주려 이리 저리 고민한 것도,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너와 갓난 동생을 위해 20년간 열심히 해온 일을 그만둔 것도,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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