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잔인함을 야기한다.

다정함의 양면성

by 성윤


최근에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꽤 오래전에 사둔 책이었지만, 본래 다정과는 거리가 꽤나 먼 저로서는 완독 하기엔 난이도가 있는 책이었죠.



실제로 책의 난이도 또한 쉽지 않습니다.


제목만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다정함’이라는 단어와 다정함을 행해야 하는 이유 같은 연말연시의 따땃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책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실제 책의 내용은 진화인류학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기 전 다윈의 ‘종의 기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수월하겠더군요.



실제로 3년 전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지금 다시 읽음으로써 느낀 감정은 완전히 궤를 달리합니다.



최근에는 철학과 더불어 역사와 진화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하고 있는데요.



한 가지 개념을 '꽤나 이해했다'라고 판단하고 누군가에게 지식을 설파할 정도로 알기 위해선


즉, 앎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해당 분야의 지식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 인물의 서사에 더불어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탐구가 같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때문에 특정 분야에 대해 욕심이 생기고, 누군가에게 설파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른다면 자연스레 다양한 분야의 지식까지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정이라는 양날의 검

인류 진화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는 흔히 ‘적자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강하고 지능이 높은 개채만이 살아남는다고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진화인류학 교수인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통해 이 관념이 틀렸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도 여러 종이 있었던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현재 우리 인간은 조상 ‘호모 사피엔스’가 끝내 살아남아 번영하고 있는 단일 종이 되었죠.(단군할아버지가 아니었음!)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가 수많은 종 중 끝내 생존한 이유는 적자생존의 개념과 거리가 있어요.



실제로 우리와 다른 종인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는 비교적 적은 근육량과 덩치와 뇌용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제치고 호모 사피엔스가 종의 번성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다정함’에 있습니다.


무리 간 공격성을 낮추고 협력적 성향을 높이는 개체들이 결국 더 많은 자손을 남기게 되는 것이죠.



책에서 말하는 다정함이란 타인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는 능력 그러니까 타인의 특정 행동을 보고 타인의 마음을 유추하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특성은 개나 보노보 같은 동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인간에게 우호적인 개체끼리 번식을 시켰을 때 불과 몇 세대만에 번식주기가 짧아지고 공감능력이 생겨난다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몇 만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인간의 공감 능력을 어떠한 종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력하고, 번식 능력 또한 우월함에 달해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치명적인 역설이 발생합니다.



인간의 다정함은 ‘보편적 인류애’라는 폭넓은 사랑이 아닌 ‘집단적 애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라고 인식하는 울타리 내에 사람들에겐 한 없이 친절하며 공감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 있는 ‘그들’은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하죠.



모니터 너머에 있는 ‘그들’에게 비난을 쏟아내기 너무 쉬운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인간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 눈앞에서 함께 밥을 먹고 대화하는 ‘우리’에게 비난을 쏟아내기란 쉽지 않죠.



실제로 뇌과학으로 증명된 이야기인데요.



단순히 지구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를 아는 것을 넘어, 우리는 누군가와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하거나 지속적으로 접촉할 때 뇌의 ‘공감 차단 기제’가 해제됩니다.



반대로 공통의 목표를 가지지 않은 누군가에겐 공감 차단 기제가 활성화되며 공감 능력을 잃게 되고 이는 곧 우리와 같은 인간, 그러니까 같은 종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우리'라고 인식하지 않는 다른 사람은 마치 벌레와 다른 동물을 대하듯이 인식하게 되는 거죠.




우리는 생물 최고의 다정함을 보유한 인간이 대체 왜 전쟁과 살인 같이 같은 종을 파괴하는 행위를 이어 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틀러 혹은 스탈린 같이 현시대가 평가하기에 ‘악인’으로 치부되는 그들 또한 사실은 극단적인 다정함에 의거하여 본인의 다정함을 그들이 인지한 '우리' 세상에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지요.



이런 다정함이 가지는 역설이 바로 극단적 정치색과 내재된 공격성의 원인입니다.



옥시토신은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위협하는 외부에 대해 신경 기제상의 공감을 차단해 버리고, 그들을 제거해야 할 부품 정도로 처리합니다.



철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철학의 오류는 아이러니하게도 ‘진리’라는 것이 절대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특정 시대에 살아가며 외부환경에 철저히 노출되어 살아가는 특정 인물이 주장하는 철학은 반드시 시대상과 인물의 내면에 기재된 그림자 같은 다양한 것들이 투사된 결과물입니다.



이렇게 진리가 절대 존재하지 않는 철학이라는 것은 같은 인간을 범주화를 시키고, 깊이 낮은 해석으로 우월함을 느끼며 ‘우리’라는 집단을 축소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ㅇㅇ학파 같은 것들이 있죠.



철학이 가진 한계 또한 여기에 있고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철학은 차 트렁크에 넣어 다니는 빠루 정도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살다가 평소에 빠루를 꺼내 휘두를 일이 없죠.


그런데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골머리를 싸매다 순간 트렁크에 있는 빠루의 존재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제야 빠루를 휘두를 순간이 찾아오겠죠.



철학은 주머니 속의 망치, 트렁크 속의 빠루 그냥 그 정도인 거예요.

문제없이 별 탈 없이 평이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겐 철학은 사치입니다.




항상 더 나은 '나'가 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은 욕심이 큰 인간들에게나 철학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평이한 삶이 지속되면 되려 불안함을 느끼고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겐 문제를 해결해 줄 철학이라는 빠루가 필요한 것이지요.




돌아와서 우리 인간이 종으로서 가진 최고인 무기인 ‘다정함’은 결국


내가 ‘우리’라고 인식하는 공통의 목표를 향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라면 누구든 다정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라고 인식하는 범위가 좁다면 당연히 그 다정함이 닿는 범위가 좁을 테고요.


우리라고 인식하는 범위가 넓은 사람이라면 다정함이라는 범위 또한 더 많은 사람에게 적용되겠죠.




리더의 다정함


인간은 포용적 다정함을 발휘하기 위해선 ‘우리’라는 범위를 넓게 가져야 합니다.

저는 진정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리더’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라는 범주를 끝없이 넓혀 서로를 잡아먹는 비인간화의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



리더의 자세란... 음 그러니까 대통령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싶네요.



존 케네디 대통령이 역대 GOAT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유를 아시나요?



공화당과 민주당이 박 터지게 싸울 당시 존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게 ‘달 착륙 작전’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제시하게 됩니다.



인간이 한 번도 정복하지 못한 곳 ‘달’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구성원에게 던져 구성원 모두를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지지자 따위가 아닌 ‘달 착륙을 염원하는 우리’로 묶어 버린 행동인 거죠.



올림픽, 월드컵 또한 같아요. 돌이켜보면 이 시즌에는 유독 잘 안 싸우죠? 우리가 국가라는 거대한 소속감을 인지한 '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응당 리더라면 구성원 모두가 공동의 목표를 보고 움직일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리더의 덕목과 그릇을 엿볼 수 있어요.


‘우리’라는 범위를 좁게 설정하여 내부 결속을 다지고 외부를 ‘그들’로 규정하고 비인화하게 만드는 리더 (나치와 공산화를 외치는 그 짝 국가들이 대표적이죠)



‘우리’라는 울타리를 현재의 갈등 너머로 확장하여 인류가 바라보는 소실점을 저 멀리 던지는 것.

구성원 모두가 포함될 수 있는 거대한 소실점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이 현재 박 터지게 싸우는 진짜 근원적 이유 또한 알게 되셨을 겁니다.



‘우리’라는 다정함이 닿는 범주가 너무나 좁기에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민족끼리도 서로를 깎아내리는데 골몰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저 개인의 사명을 ‘인류의 계몽’이라고 설정하며 사는 것 또한 리더의 삶에 어느 정도 기인하고 있는데요.



진정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다정함의 범주를 한 없이 키워야겠죠.



그러기 위해 나 자체가 인지하는 ‘우리’라는 범주 또한 한 없이 넓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지식을 쌓아 넣고, 자기 검열을 통해 내가 현 인류에게 던져줄 수 있는 거대하고 멀리 있는 소실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는 것이 진짜 인류 대통합 인간 계몽의 첫걸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소실점이란 제가 만든 수많은 오류와 진리를 찾으려는 발버둥 끝에 남게 되는 하나의 작은 논리 구조가 되겠지요.

제 짧은 삶 속에서 유일하게 남기고 싶은 것 또한 이런 논리 구조입니다. 돈이나 건물 따위가 아닌 훗날 누군가가 곱씹어 볼만한 작은 무언가.



어쩌면 많은 철학가들이 본인이 창조한 개념을 설파한 진정한 의도는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이 길었지만 결국 다정함이란 타고난 공감능력이나 이타심 따위가 아닌 내가 인지하고 있는 '우리'라는 범주가 얼마나 넓은지에 따라 그때그때 결정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폭력성이나 비다정함 또한 단순히 그가 공감능력이 결여된 인간인 이유보다, 그가 설정한 '우리'라는 범주가 좁기에 나를 같은 종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고요.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다정함이 결여된 비 도덕적 행위를 행한다면 그 말에 상처받거나, 자신을 책망하기보다 "이 인간은 나를 우리라는 범주에 묶어두고 있지 않구나" 정도로 생각하심이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그릇이 김장 다라이처럼 넓은 인간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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