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인지

당신은 메타인지하였는가?

by 성윤
'메타인지'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 가치를 숫자로 셈하는 사회 초년생 시절에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단어이다.



부모가 나를 품어주던 10대에는 메타인지라는 단어가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 대학생 시절 또한 마찬가지.



때문에 직장에서 통용되는 메타인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물어본다면,

흔히 내가 가진 업무능력에 대해 철저히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직장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그 사람의 인성, 외모가 아닌 업무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어사전에서 정의한 메타인지의 의미를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메타인지와는 그 뜻을 달리한다.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 발견, 통제하는 정신 작용.



문장을 뜯어 본다면 아래와 같은 뜻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인지 = 내가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 지각, 기억, 상상, 개념, 판단, 추리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한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 발견, 통제하는 정신작용 = 1인칭이 아닌 한차원 높은 단계에서의 관찰



그러니까 메타인지란 내가 어떠한 자극이나 정보를 ‘인지’하는 과정 자체를 ‘인지’하는 정신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인지라는 단어는

사람을 평가하는 행위,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같은 정보를 받아들이더라도 나의 가치관이나 정신 따위로 크게 좌지우지 된다는 이야기다.



즉 내가 무언가를 인지한다는 행위는 나의 욕구, 콤플렉스 등 나의 가치관이라는 필터를 통해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콤플렉스란 심리학자 칼 융이 정의한 그림자의 개념



결국 메타인지의 참 의미는

나의 욕구, 콤플렉스(그림자) 등 내가 정보를 처리하는 가치관 필터를 정확히 알아가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물어보자면,

당신은 당신이 가진 욕구, 콤플렉스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즉 당신은 메타인지를 하였는가?




생각보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내면에 있는 욕구나 콤플렉스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욕구나 콤플렉스가 투영되는 행위는 내가 의식하고 행하는 영역이 아닌,

나의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의식

의식과 무의식을 쉽게 알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새롭게 만난 A라는 사람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편한 감정이 들고, 말을 섞기 꺼려진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무의식의 영역에 있다.

하지만 우리 뇌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명확히 언어로 정의할 수 없기에,

의식의 영역에서 그사람에 대한 정보를 사후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문제를 평가할 때 대부분의 정보는 사후합리화 처리 된다고 한다.)



말투가 별로야.

행동이 왜인지 모르게 거만해.

살짝 남을 깔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느낀 불쾌한 감정에 대해 합리화 하기 위해

‘참’의 정보가 아닌 나의 편견으로 가공한 거짓의 정보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쾌한 감정의 기저에는 99% 나의 무의식 저편의 욕구와 콤플렉스가 투영되어있다.

예를 들어 나는 조용히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고, 번잡한 환경을 극도로 싫어한다.

(혹은 어릴적 나와 반대의 성향의 사람에게 크게 상처를 받았거나)

하지만 새롭게 만난 A라는 사람은 행동이 번잡하고 극도로 활기찬 성향을 지녔다.



이때 우리 뇌는 나에게 생존 신호를 보낸다.

A는 내가 편하게 있을 수 있는 환경에 해가 된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미 "A는 나에게 해가 된다"라고 나에게 불쾌감을 보내 해가 되는 존재로 정의하였지만,

무의식을 인지하지 못한 우리는 온갖 이유를 찾아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의식의 영역에서 합리화 하게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으나 인간은 대부분 본인의 욕구나 콤플렉스 따위를 생각보다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무의식에 있는 정신은 대부분 ‘언어’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

언어학자이자 구조주의라는 사상을 본격적으로 퍼뜨린 소쉬르는

"인간은 언어로 세계를 인식한다" 라고 말한다.



만약 ‘커피’라는 언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커피의 향, 색깔, 맛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떠올린다.

반대로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커피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의 영역이자 개개인의 내면은 복제품이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살아온 환경, 들어온 언어, 읽은 책이 전부 다르기에 나와 같은 내면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이 세계 안에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커피,휴대폰,담배는 모두가 똑같이 떠올릴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언어’로 정의하고 모두가 똑같이 인지할 수 있는 개념이 된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욕구와 그림자는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오직 당신만이 정의 할 수 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가인 자크 라캉이 남긴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지 않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진다."



욕구=욕망

그림자=콤플렉스



헌데,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의 언어로 내 삶을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공허함과 고통에 직면한다.



설명이 안되거든.



결국 메타인지를 한다는 것은, 내 안의 이름 없는 욕망과 콤플렉스에 '나만의 언어'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세상이 정해준 단어가 아닌,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언어로 내 내면을 정의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운 나의 삶을 살 수 있다.




철학의 쓸모

철학과 인문학이 삶에 적용되는 과정이 바로 이 지점이라 생각한다.

현대에서 철학은 고리타분하고, 돈 한푼 안되는 쓸모 없는 것으로 취급되지만, 인간의 삶에 반드시 일정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철학은 내 인지 과정 전체를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이자, 고착된 편견을 부수는 도구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선 철저히 논리적으로 나 자신이 스스로 납득되어야한다.



예를 들어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에 대해 100% 이해하게 된다면,

"삶은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의 연속이기에 삶을 영위할 이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카뮈의 '페스트'에서 정의한 자유에 대해 논리적 추론이 완료된다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이 정의가 새롭게 설계된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번째 산' 참고)



즉, 인간은 철학적 추론을 통해 나의 욕구를 선명하게 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가 만든 기준이 아닌 나의 욕망을 올바르게 나의 삶에 투영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철학이라는 도구 없이도 본능적으로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사색의 과정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던져주는 도파민에 휘둘리고,

이유 없는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메타인지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당신의 삶에 존재해야한다.



아니, 언젠가는 스스로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존재의미를 항상 갈구하기에.



당신은 당신의 욕구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에 대해 '메타인지'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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