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화가 하고 싶어요? 왜 글이 쓰고 싶어요?
" 왜 영화가 하고 싶어요? 왜 글이 쓰고 싶어요?"
이런 질문들을 들을 때마다 준비해놓은 답변 하나가 있다. “삶에 지쳐 굳어있던 엄마가 영화를 볼 때는 유일하게 일상을 잊은 듯 작품에 몰입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굳어진 감정을 지닌 채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는 동안만이라도 모든 걸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강렬하게 남은 기억의 파편 한 조각 때문이다.
기억은 택시 기사의 화가 난 목소리와 함께 오빠와 나의 우는 소리가 들리며 시작된다. 나는 택시 뒷좌석에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 오빠의 손만 붙잡고 울었다. 그 소리들이 마구 들리다가 아저씨는 우리에게 내리기를 종용했고 우리는 길 한복판에 서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서로의 손만 잡았다. 잠시 담배를 사러 간다던 아빠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빠는 택시에 오지 않았고 우리는 택시 뒷좌석에서 길로 내쫓기게 된 것이다. 아무리 눌러도 받지 않는 아빠의 전화에 기사 아저씨는 굳은 표정으로 엄마의 번호를 물었지만 오빠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후 하루에 몇 번이고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엄마 번호를 눌러대던 나 또한, 그날은 엄마의 번호를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나서 엉엉 울었던 거 같다. 7살이 되던 해였다.
길거리에 서서 오빠와 나는 계속 아빠를 기다리며 울었다. 공중전화기를 앞에 두고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전화를 걸지 못하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울기만 했다. 볼이 터질 것처럼 차가웠던 바람을 기억한다. 얇은 외투 속에 들어오는 차가운 냉기를 잊지 못한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칼날 선 바람을 통해 깨달았을 때, 오빠는 그제야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짧은 탄식이 들리고 곧바로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우리에게 어떠한 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우리를 끌어안고 울기만 했다. 우리도 울기만 했다. 버려진 기억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오빠와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 때까지 버려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또다시 엄마에게 까지 버림받을 수 있는 상황 또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 두려움은 컸지만, 그보다 더 바람은 차가웠고 외투는 얇았다.
아빠를 다시 마주한 것은 엄마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엄마의 품에서 한동안 울던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될 때쯤, 몸의 떨림이 진정이 될 때쯤이었다. 엄마의 어깨와 목에 마구 얼굴을 비비다가 고개를 든 그 찰나에,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풀 숲 사이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아빠를 마주했다. 아빠를 보고 두려웠던 것은 처음이었다. 아빠가 맞을까, 이때까지 보던 아빠가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두운 풀 숲 사이에 보이던 눈동자가 강하게 보였다. 그리고 아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왜인지 그때의 나는 아빠가 먼발치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엄마와 오빠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빠가 죽던 날까지도 나 혼자만의 장면으로 남겨둘 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이 장면 하나를 홀로 그리다 글 쓰는 법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7살이던 나는 이 장면을 몸에 품고 초등학교에 갔고 중학교에 갔다. 그렇게 15살이 되었을 때, 책과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은 늘 그렇게 성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에게 버려져도 길거리에 나뒹굴어도 성장했고 행복했고 사람을 얻었다. 나는 처음으로 글을 썼다. '내 인생의 글도 마찬가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행복할 것이고 성장할 건데 아직도 7살의 나는 그 자리에서 머물고 아빠만 바라보는 것이 슬펐다. 7살의 나에게 결국 그 끝은 행복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그려줘도 되지 않을까. 이 파편이 정리가 될 때까지 수많은 모양으로 변형하고 그리다 보면 언젠가 나도 그 장면에서 벗어날 때가 올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장면을 넘어간 다음의 이야기를 그리며 행복을 자연스럽게 그릴 것이다. 그럴 때가 있었지 하며 넘길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