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심연
일요일 저녁에 보기 시작해 월요일 오전에 다 봤다.
총 7편, 각 편당 30분 내외 정도.
남주가 스토킹 당한다는 단편적인 줄거리만 안 채 별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다가 졸지에 주인공과 함께 멘탈이 실시간으로 나가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우선 연출은 훌륭한 편.
연기도 훌륭한 편. 남자주인공을 연기한 리처드 개드가 겪은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고 하니
작중의 끔찍한 경험과 불안, 강박, 자기혐오 등등의 복잡한 심리가 (괴로울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집중해서 본 드라마는 손에 꼽는다.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다른 할 일 제쳐놓고 7편을 연달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그만큼 재밌긴 하다는 뜻이다.
아래로는 스포 주의하세요 아직 보기 전이고 아주 조금이라도 볼 의향이 있다면 절대 읽지마시길 꼭 넷플 가서 보고 오시길 보실거면 멘탈 주의하시길
제일 괴로웠던 건 스스로도 도저히 제동을 걸 수 없는 자기파괴의 폭주기관차(ㅠㅠ)가 내달리는 모습과 그 기저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지켜보는 일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처절하게 괴로워본 적 없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발견한 적 없을 사람들은 남주가 답답하고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할 텐데,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누가봐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심한 허언증이 있으며 이미 수차례의 심각한 스토킹으로 실형을 살았던 전적까지 있는 사람이 본인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는데 그걸 방치한다. 방치 뿐만이 아니라 부추기기까지 한다. 마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마사의 집까지 미행해 마사를 훔쳐보다 걸리고, 마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녀를 달래고 챙겨주기까지 한다. 상식적으로 마사와 같은 사람이 그 모든 제스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남주가 몰랐을 리 없다.
6개월이나 지나서야 신고하지만 그마저도 마사의 범죄 전적과 남주의 데이트 상대에게 실제로 행한 공격과 같이 유의미하고 중요한 사안은 의도적으로 숨긴다. 그렇게 남주의 방관 아닌 방관 아래 일은 점점 커지고, 데이트 상대뿐만 아니라 전 애인과 부모님께까지 그 피해가 미친다.
그렇게 답답하다는 생각과 남주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4화....와 마주하게 된다.
4화를 떠올리려니까 무진장 심란하네
7부작의 중심에 자리한 4화에서 우리는 남주의 과거 중 한 사건을 낱낱이 들여다봐야 하는데, 참으로 심란하다.
남주는 성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몇 년전 자신에게 접근한 코미디계의 거물인 중년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따르게 된다. 그 쓰레기는 권위를 이용한 manipulation에 아주 능한 전형적인 쓰레기인데, 남주에게 마약을 하도록 강요하고, 정신을 잃은 사이 성추행을 한다. 그리고 성공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주며 어떤 대가도 없이 코미디 작품을 쓰게 한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다... 결국 남주는 심하게 약을 하곤 성폭행을 당하는데 그러고도 신고하지 않고(ㅠㅠ), 더 이상 쓰레기와 만나지는 않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성지향성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적으로 학대당한 경험이 페티쉬가 될 수 있다는 것 < 이 지점에서 멘탈이 아주 아주 갈렸는데..
방어기제가 그렇게나 끔찍한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작중에서도 남주가 남성들과 무차별적인 성관계를 하며 '그런 일이 많아지면 그 날의 일은 그렇게까지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우리는 알지만 그건 우리가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니까..
솔직히 성공하게 해준다는 말만 철썩같이 믿고 주는 마약을 죄다 하고 반복적으로 성추행을 해도 순응한다<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가고 그렇게까지 구차하고 찌질하게 살아야 할까? 라고 생각했다.
근데.. 본인 입으로 본인이 너무나 나이브했고 또 자기혐오가 심각했다고, 그래서 안된다는 무의식의 외침을 무시했다고, 자기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걸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냥 심란할 뿐
그리고 그런 구차하고 찌질한 유약함과 자기혐오를 바탕으로 '뭐라도 된 것 같은' 자신을 갈망하여 성공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게 10정도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걸 간파하고 가장 악질적인 방식으로 착취한 가해자의 잘못은 990 정도이므로, 다시말해 비교가 안되므로 남주에 대해서는 그냥 심란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어떤 근거를 들든 피해자의 탓을 하는 건 가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아니 근데 끝까지 보고 나니 남주 부모님 더없이 좋은 분이시던데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자기혐오가 심했던걸까?
'나 더 이상 헤테로가 아닌 것 같아요 헤테로인 아들을 택하든지 죽은 아들을 택하든지 선택지는 둘 밖에 없어요' 라고 반협박의 고백을 했을 때 바로 그건 말할 것도 없다며 꼬옥 안아주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아무튼
4화가 끝난 후 다시 마사와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장장 1년 8개월인가동안 마사에게서 벗어났다가 다시 시달렸다가를 반복한다. 왜 다시 시달리게 되냐면 남주가 계속해서 여지를 줘서... 심지어 마사가 잠잠해진 동안 애인이 된 트랜스 여성과는 성관계를 못하다가 마사가 전에 주고 간, 속옷만 입은 사진을 보고 자위를............. 한다. 마사를 그리워하다 마사에게로 달려가 격렬한 성관계를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결국 애인과는 헤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정신으로 신인 코미디언 결승에서 본인이 겪은 일들에 대해 처절하게 고백하는데 그걸 누군가 몰래 찍어 올린 영상이 대박이 나서 그토록 원하던 성공한 코미디언의 삶을 살 수 있을듯 보인다. 게다가 마사도 (드디어?) 9개월 형을 선고받고 5년의 접근 금지 명령도 내려진다. 와! 불행 끝 행복 시작!
이라고 나도 생각했는데 남주가 유별난 인간인건지 트라우마와 자기혐오의 중력이 그토록 대단한건지
기껏 얻은 일을 죄다 때려치고 마사를 이해하고 싶다며 방에 틀어박혀 마사가 보냈던 음성 파일과 메세지만 하루종일 분류하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나를 스토킹해서 내 인생을 망하게 할 뻔했던, 그래서 감옥에 가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할까? 일단 나는 절대 아닐듯
그런데
마지막화가 끝나갈때까지도 너무 병적으로 도파민이 돌고 재밌다고 생각했거든 분명
그런데도 끝까지 보고 나니 그 모든 내용은 마지막 2분여를 위한 빌드업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안보신 분들 이 스포라도 피하시길 제발)
남주가 다시 쓰레기를 찾아가서, 다시 함께 일해보자는 쓰레기의 제안에 '좋아요'라고 말하고 나온 뒤 자기혐오에 어쩔줄 몰라 하다 마사의 음성 메세지 중 '칭찬'으로 분류된 것들을 들으며 위안삼는 크리피함부터 소름이 돋았다가
이 장면을 보는 순간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
남주가 정말 진정으로 마사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자 남주와 마사 모두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불행과 자기혐오를 기반 삼아 두 인물이 (심연에서...) 공명하는 순간이었다.
아 너무너무 소름돋아
다시 봐도 소름돋아
이 마지막 2분이 없었다면 이런 리뷰를 쓸 생각도 안했을 것 같다.
모든 게 실화라고 하던데... 아무리 약간의 각색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세상에서 벌어져도 되는 걸까? 그리고 누군가의 이런... 내면을 내가 이렇게까지 낱낱이, 깊숙이 봐버려도 괜찮은 걸까?
나와 리처드 개드 모두에게 괜찮은걸까?ㅋㅋㅠ
찾아보니 리처드 개드는 이 내용을 일인극으로 만들어 연기했었고, 그 연극을 바탕으로 드라마가 탄생했다고 한다. 심지어 '마사'의 현실 인물까지도 토크쇼에 나왔었다고 한다. (당황스러움)
아무튼 정말 재밌습니다 시간과 멘탈에 여유가 되신다면 한 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아 맞아 그리고 남주가 코미디 하는 모든 장면....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꽤 자주 나오는데 정말 보기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