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바예호, 1994
멕시코에서 긴 시간을 산 콜롬비아 태생 작가의 분신인 화자, '나'는 조국 콜롬비아, 고향 메데인이 보여주는 현재진행형의 파멸을 냉소적이고 날선 목소리로 진술한다. 그의 언어는 거침없고 분노에 차 있으며 그가 보여주는 메데인의 공기는 절망적으로 제자리걸음하며 소용돌이친다.
"우리 조국 콜롬비아 역시 그를 받들고 있어. 그는 바로 예수이고,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고 있으며, 상처 입은 가슴에서는 심장이 피를 흘리고 있어. 새빨갛고 조그만 핏방울들은 마치 풍등 안에 환히 켜진 양초 같아. 하지만 그건 영원히 콜롬비아가 흘릴 피야.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화자는 파블로 에스코바르, 메데인의 뿌리깊은 자상에서 '피'가 더욱 세차게 솟구치도록 한 그 전설적인 마약상이 1993년 12월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 마침내 총 세 발을 맞고 사망한 직후 콜롬비아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에게 콜롬비아는 피흘리는 심장을 가진 예수를 열렬히 받드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피흘릴 조국이다. 중남미의 무너진 역사의 시작점을 15세기의 위대한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가 되짚는 수고 없이도 우리는 이미 그 과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도 화자도 굳이 지면에서 그 작업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그 현실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종결됨 없이 지속되리라고 엄중하고 냉소적인 진단을 내릴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3일 동안 이 작품을 붙잡고 있으며 알게 된 것, 아니 그보다 정확히 재확인한 것은 문학가는 절대 냉소적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문학 작가의 냉소는 그 자체로 정교한 반어법이다. 작가가 내세우는 목소리가 냉소적일수록 그 목소리에서는 고통스러운 울분과 연민이 더 강렬하게 읽힌다. 현실을 진단하고 얻은 것이 격분 혹은 절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비웃어 넘기며 업신여기기에 그치는 이들은 우리의 마음 속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처절하고 철저한 일련의 문장들을 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을 끝까지 손 안에 움켜쥐고, 끝까지 밀어붙여야만 한다. 냉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작품을 읽으며 괴로웠다.
나는 지상의 고통스런 인간사와 그럴수록 인간들이 매달리는 헛된 종교적 환상이라는 이분법에 너무나 익숙한 독자이다. 서사가 있는 모든 예술매체에서도 그리고 우리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그 이분법의 괴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대비 자체는 더 이상 내게 어떤 충격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러한 상투적이고 구조적인 설정 너머, 작가의 표현력 그 자체이다. 그리고 앞서 쓴 ‘괴로웠다’는 단어 하나로 바예호의 작가로서의 역량은 증명될 수 있다.
3년 전 여름에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의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었다. 20세기 말의 콜롬비아 보고타. 시공간적인 배경, 주제의식 등을 위시해 전면에서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작품을 읽으며 바스케스의 이 작품을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내게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은 말 그대로, 거대한 전투기가 지척에서 곤두박질치며 내는 어마어마한 소음으로 기억된다. 읽는 내내 고요한 글자들 사이사이에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고 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소음,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비일상적인 폭력의 소음이 고개를 내밀었다. 통제할 수 없는 굉음은 존재의 기반을 억세게 움켜잡고 뒤흔드는 불안함의 상징이다.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추락하는 비행기라는 끈질긴 소재의 위력은 그 폭발적이고 폭력적인 굉음을 연상시키는 제목에 고스란히 구현되었다. 한 시대의 구성원들에게 각인된 공포의 보편적 특성과 개인의 삶에 깊게 침투한 두려움은 이 작품 전반에 서려 있다. 소설 속에서 이 시절을 살아내는 인물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무질서와 갈등에 휘말리면서도 자신이 추락 중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순 없다. 일견 평범해 보일 일상이 실은 공포로 점철되어 있으며 나를 구성하는 현재가 외면하고픈 공통의 과거를 껴안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공포의 편재성을 이유로 나의 고유한 공포는 사소하며 특별하지 않다고 진단받고 그것을 떨쳐내지 못함으로 조롱당하는 것은?
안토니오는 간헐적인 비명소리와 출처를 확신할 수 없는 파열음을 듣는다. 사람 소리가 아닌 소음 또는 바로 그 사람이 내는 소음, 소멸되는 생명들의 소음이지만 깨지는 물질의 소음이기도 하다. 높은 곳에서 물건들이 떨어질 때 나는 소음, 중단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소음, 결코 끝나지 않고 사라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음. 그 소음은 965편의 조종실에서 들리는 마지막 소음이다.
3년이 지나 <청부 살인자의 성모>를 읽으면서는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심상, 다시말해 일상적인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무감각한 환호 소리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문학가와 독자의 냉소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알렉시스의 죽음에서 일마르의 죽음으로 그 어떤 종결도 각성도 없이 넘어가는, 이름은 달리하나 '하나뿐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투명하고 공허한 예감, 그 절망적인 반복과 답습과 권태 다음에는 무엇이 제시될 수 있어야 할까?
이를 오랜 시간을 들여 숙고하지 않는다면, 냉소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완독한 것이 내게는 단순한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