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관찰은 하나의 기억이다.
나는 “내 눈으로 보는 모든 것“ 이 하나의 조각으로 저장되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된다고 믿는다.
내가 보는 색깔, 텍스쳐, 모양이 모두 차곡차곡 쌓이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때에 빛을 발휘한다.
기억에 남는 일화로서, 몇 차례의 전시회에 갔다 온 이후 작업을 했다.
작업을 완성하고 그 작품들을 다시 확인했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느꼈던 색깔과, 구 성들이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결국 표현하는 모든 것은 내 눈과 머리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 표현되는 형태는 다양하다.
다른 관찰의 기억과 혼합돼 표현될 수도 있고, 색깔의 조합만 보일 수도 있고, 그 기억 그대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어떤 경험을 하던, 눈의 신경을 곤두세워 그 장면을 담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신비로운 건 ,“어떻게 보냐 “ 에 따라 내 눈의 기억이 달라진다. “관찰” 과 “보는 것” 은 다르다.
관찰은 내게 어떤 기억이 남을지를 예상하며 보는 것이고, ”보는 것“ 에는 아무 감정이 없다.
“관찰”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눈의 기능을 쓰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작품을 보다 보면 오직 그 잔상만이 남는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갔는데 “보는 것” 에만 집중한다고 해보자.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모나리자와 고흐, 모네 작품을 ”눈으로 보러 “달려간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내 작업을 하려 종이를 펼칠 때쯤, 내가 뭘 봤지?라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때 봤던 수많은 작품들이 깜깜하게 아른거리기만 한다.
하지만 관찰했다면?
그 작품들은 눈과 머리에 또렷하게 저장된다. 그 기억들이 표현에 명확히 적용된다. 그저 보는 것 만으로는 남지 않는다. 관찰해야 한다.
관찰은 느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작품의 색깔을 느끼고, 작품에 고스란히 남은 작업과정을 느끼고,
작가가 남긴 터치 하나하나의 에너지를 느낀다.
무언가에 영감을 얻고 싶다면 , 무작정 많은 것을 보려고 하기보다 내가 정말로 “관찰“했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관찰을 생각하면 아주 디테일한 작업물이 떠오른다.
난 작업할 때 디테일을 꽤 신경 쓰는 편인데,
내 눈에 띄는 작품들은 두 가지가 있다.
색감을 경이롭게 썼거나, 평범해 보이는 작품인데 왠지 눈에 돋보여 가까이 다가가면, 디테일에 극도로 공을 들인 작품이다.
그렇게 공을 들인 작품들은 그 자체로 빛날 수밖에 없다. 단순히 그린 작품과, 표현하기 위해 시간이 공들여진 작품은 멀리서도 티가 난다.
그 작품에서 보일 수 있는 모든 색감, 재질, 텍스쳐, 오브젝트 모두가 그림 하나에서 표현돼 어우러진다.
사실 극도의 디테일의 작품만이 선사하는 신비한 경험이 있는데,
그 작품을 다 관찰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면, 주변이 사뭇 다르게 보인다.
마치 다른 눈을 가진 것처럼 신경이 예민해져, 평소에 보지 못했던 작은 디테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때, 잠깐이나마나 작가의 눈을 훔쳐 오는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그 작가의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느낌이 든다.
벽의 주름과, 벽의 색깔, 사람들의 물건. 생김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다른 재밌는 경험도 있다.
작품을 보고 하얀 벽을 바라보는 것.
단순한 흰 벽인데도 연보라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어두운 노란색……내가 봤던 모든 디테일의 잔상과, 그 공간의 빛들이 그 흰 벽 안에 모두 남겨진다.
마치 숨겨졌던 색깔들이 버튼을 눌렀을 때 쫙! 하고 나타나는 것 같달까.
이 말이 조금 괴짜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일반적인 글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싶다면, 한 번쯤은 시도해 보길 바란다.
디테일은 단순히 세밀한 작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내가 낼 수 있는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써보는 것에 가깝다.
이 작품이 어떻게 보일지 수많은 고민을 하는 것도,
작은 오브젝트를 활용해 어떻게 최대한의 효과를 낼지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디테일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간단한 예술들은 이런 끈끈한 집착들의 산물이고, 명확한 효과를 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