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hnnie et Travis Nov 29. 2023

19 23 7 9

선택을 위한 육감



    확실한 신념으로부터 지시되지 않은 고된 시간을 겪을 때는 그것을 선택의 기회라고 생각하기, 육감의 불이 들어와 있음을 의식하기, 무엇 때문에? 양심을 갖춘 삶이란 차라리 고생스럽다고 체념하기로 해서? 그러나 거부의 느낌으로 언도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일치된 느낌의 훨씬 이전부터 돌려놓아 진 뒷면을 짚어보고 또한 앞면인 비전을 알아보기. 그리하여 지구를 향한 앞모습과 지구를 향할 뒷모습을 아울러 우리가 둥근달이라고 부르듯 나를 구석구석 상회하는 존재를 찾아내기. 왜냐하면 일부러 언도한 ‘느낌’이란 편의의 기승과 그 고질성에 충실한 지엽들로부터 탈출한 것이기에.

    그것은 충실한 종의 육감. 한 충실한 종이 믿음으로 환원할 수 있는 일과 반대로 믿음을 바쳐야 하는 일을 구분 짓자. 그렇게 그 자신이 알기 위해서, 앎에 따라오는 행위나 구사, 여기서는 관사처럼 배당되는 문법적 효과를 이용하자, ‘발탁’, ‘방향’, ‘사역’이라고, 행함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정렬의 결과에서, 구원의 섭리를 기웃거리는 자의 피막 밑으로 비쳐 보이는 지순한 존재감을 허락된 고유 자아라 믿고 건사해 올리는 과정 자체가 자아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앞면과 뒷면, 시작과 끝, 확신과 육감의 애매모호함으로 인해(과정이 대상화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깨닫고자 했던 구원에 대한 열망과 믿는 자로써의 겸허한 신분을 구분하기는 퍽 어렵다. 믿는 자로써 얼굴을 가지는 기쁨조차 열망의 대상과 합치되어 자아실현의 전후 관계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어리석음의 연유로, 나는 육감을 하나님께 하사 받았다고 생각한다.

    남겨진 질문들.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행함의 가능성이 무엇 때문에 내 앞에서 기를 쓰는가, 내가 원해서 찾아냈는가, 발견됐는가, 나의 부름을 받고서 아니 그보다는 하나님의 부름에 전사된 나의 부름에 다가 온 모든 기회들이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의 기회를 욕망하는 자로써 궁극적인 기쁨을 일구어 내는 존재라는 믿음이 태초에 있었는가,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만들고 싶었으며 그것을 무엇을 통해 확인받고자 했는가.

    그리고 또 다른 광명. 귀한 빛을 받아 빛나는 형상. 염탐자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계획을 더듬어 설계되어 날 선 육감이 종착되는 적나라한 감각, 표적, 이적의 역사를 어딘가 꿈꾸지는 않겠는가.


    육감은 이렇게 일한다.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한 날임을 한낱 바보는 거듭 모르는 것이다. 섭리대로 작은 장치가 심어지자 육감이 일할 때라는 것을 아는 것도 그저 감사한 일.

    믿음에 대한 선도, 그리고 당사자를 놀게 하지 않는 작은 통증들과의 연합은 굳건했다. 그들은 당분간 지쳐버리지는 않을 것을 당부하듯, 사사로운 이익일랑 잊어버리자는 듯, 그런 근근한 계몽으로 어딘가 연약하게 자리해 있었다. 나는 이들이 때때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 기술 결핍의 강제성이 스스로의 무용함을 비난하기로 한 이상 내가 그 취지를 넘어서는 명분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순간 어떤 흐름이 음악을 결렬시켰다면 지금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기술을 통한 청각 유희는 언제나 그런 자가당착적인 성찰을 배비하기 때문에 행여나 화가 난다면 그것을 이 성찰에 합류시키는 거다. 화를 데리고 가면 더 이상 화가 되지 않을지니.

    이런 점으로 나는 많은 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며 무신경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누렸던 것의 졸렌에 경계심을 심어주었다는 점, 요즘 같은 세상의 기술력을 온몸으로 방증하지만 그것의 종말을 주지하기 위해서 더 본격적으로 존재하려 한다는 점, 음악의 희생을 통한 일종의 속박—음악이 있다면 들을 수 있고 없다면 들을 수 없는—에 감사하는 바다.

    지금은 음악이 들려질 수 없음에 감사하는 바다. 또 음악이 없는 시간 다음에도 고무를 위한 시간이 이어지리라는 앎에 감사한다. 두어 시간 남짓 주도력에 쥐어져 있는 이 시간이 다소 고역인 것은 사실이다. 감사한데 감사함을 활용할 줄 모르는 것이다. 작은 병정들이 나를 보좌하기 전 나는 이와 같은 시간에 대해 감사한 줄도 몰랐겠거니와 무참한 소일들로 죽이고 있었겠지. 눈과 정신이 고통받는 동안에 내쫓긴 목의 병정만이 제 소임을 되찾으려고 나의 대문을 두드렸겠지. 나는 당신에게 임무를 가져온 하나님의 사절단이오, 이 통증이란 연료를 당신께 채워 놓으라는 명을 받았소, 연료통이 채워지면 자연히 임무가 읽힐 터인데.

매거진의 이전글 그 목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