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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May 16. 2024

미지의 비정상적 행복


  사람은 최소치의 믿음, 필요 분을 결코 넘어서지 않도록 절약한 믿음만을 가지려고 한다. 마치 성공하는 데 감수해야 할 고통에 대하여 인정은 하지만 최소화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무슨 고통이라도 된다는 듯이, 믿는다는 행위를 가능한 한 아끼려는 것이다.

  싫은 것, 원하지 않는 모든 것들로부터 방비하기 위해 무장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갑옷 정신은 보장된 분야(정상이라 알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또다른 믿음이다. 아니, 그저 불신이라고 말하겠다. 어차피 보장된 믿음이란 불신의 검열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지의 불가능은 가능으로서 좀체 신용을 얻지 못하고, 불가능을 마침내 기적으로 믿어버리는 짓 따위는 어땠는가. 그런 미친 짓은 언제나 규탄의 대상이 되는 이 심약한 정신 안에서, 필요 이상으로 믿어봤자 손해라는 자각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의 없다.

  모두들 이기는 게임을 하려고 한다. 대단히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가능한 것만이 가능하도록 노력할 수 있는 근거라고 여긴다. 그러나 인간은 원체 시뮬레이션을 벗어난 차원을 알 수 없게끔 설계된 존재다. 무지한 존재가 그 무지를 넘어선 세계로부터 파급된 무언가에 다가가고자 할 때 우선 불가능을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에게 불완전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가능한 존재로 태어났다면 불완전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지로 뛰어드는 것은 인간에게 설계된 몫 그대로이다. 당연한 가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미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자, 동물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미 그렇게 행하고 있다. 그들은 이기는 게임을 위해 계산하지 않는다. 그들의 유전자는 늘 불가능을 감수하고 있다. 한 순간에는 가능했더라도 그 다음 순간에는 거의 가능하지 않고, 종종 불가능에서 끝장을 본다. 다만 아무런 고뇌 없이도 이러한 투신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 대해, 우리 인간들이 제법 경외하면서도 대단히 부러워할 점은 되지 못한다. 인간은 역시나 고뇌하는 맛이 있는 생명체이며 그 재미를 위해 특별히 복잡하게 설계된 지적, 미학적, 양심적, 모순적, 이율배반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여, 미지의 불가능에 믿음을 더해 기적을 체험하라.

  무엇이 사람을 진정으로 분별하게 만들까? 지혜를 탐식하는 세상의 감미로운 말들. 이것은 이 파격적인 왕도를 수식하고 장려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실질적인 에너지가 없다. 이것은 마치 핀업걸 포스터처럼 그저 바라보기에 가장 빛나는 장식이다. 왜냐하면 삶을 이루는 실질적인 에너지는 어차피 갑옷 정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가능한 만큼 가능한 것으로 확정짓는 일은 액면 그대로 가능하기만 할 뿐 어떠한 낭만도 없는 것이다. 지혜의 보석을 박아넣은 갑옷 정신은 아주 고귀한 여정의 일부, 전초와 같이 보이지 않겠는가? 잠시 현실을 잊고 은혜로움에 위안을 받는 사람들. 그들은 눈으로는 별을 보며 손으로는 갑옷을 기운다. 아니, 눈이 별을 보기에 손이 힘을 받아 비로소 움직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이 활기찬 손들이란 별을 따라가기 위한 기관이 아닐 뿐이다. 슬프게도 별은 자기 용도를 알든 모르든 오직 갑옷을 장려하기 위해서만 빛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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