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함에서 벗어나기
내게는 인생의 2가지 중요한 변곡점이 있었다. 한 번은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고, 두 번째는 주식 투자에서 잘못 대응했을 때다. 다시 돌이켜봐도 씁쓸함이 가시질 않고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들. 지금에야 그랬었지 하며 회고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진지하고 심각했던, 허공에 하이킥 하고 싶은 순간들.
첫 이별은 내가 준비하던 언론사 시험에 줄줄이 낙방하고 졸업은 목전에 뒀으나 갈 길은 잡지 못하고 허둥거리던 때에 찾아왔다. 평생 함께 할 것처럼 호언장담하던 남자친구는 내가 잘 풀리지 않던 상황에 지쳐 버둥거릴 때 이별을 고했다. 정확히는 내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난 기억도 수채화처럼 촉촉해진다던데 정말 좋았던 몇몇 순간들이 흐릿하게 기억나는 거 빼곤 별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냥 ‘나쁜 새끼였다’는 한 줄로 이별의 지지부진했던 시간들이 또렷하게 정리되긴 한다. 물론 그땐 정말 마음도 복잡하고 매일이 힘들고 울부짖고 싶은 날들이었지만. 그때 내 눈에 나는 ‘진로가 잘 안 풀려서, 능력이 없어 버림 당한 불쌍하고 죄 없는 여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버림 당한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이별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가 더 힘들고 이별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입사 3-4년 차쯤 됐을 때였나. 주식에 빠져 그동안 모았던 목돈을 덜컥 집어넣었는데 수익률 마이너스 40%를 찍고 괴로움의 피크를 찍던 때였다. 얼핏 기억하기로 목돈 4천만 원쯤 됐던 것 같은데, 그때 나는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았다. 마치 내 인생이 망한 것 같았다. 도무지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부모님이나 주변 지인들에게 너무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던 것 같다. (1년 지나고 그 종목은 10배가 넘게 오른다.. 왓 더헬) 세상이 잿빛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게 짜증 나고 불만스럽고 되는 게 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또 그렇게 되고 보니 손해 본 돈은 얼마나 큰 가치가 있어 보이던지. 자기 비하에 빠지다가 또 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같이 느껴져서.. ‘이렇게 불쌍한 나를 네가 이해해 줘’라는 마인드 모드로 나가다가 인간관계에서도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다 우습다. 그때는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했었던가. 첫 번째 사건이나 두 번째 사건이나 지나고 보니 다 시간이 약이었고, 무려 두 번째 사건은 그냥 눈 감고 아무것도 안 했으면 심지어 자산이 10배는 됐을 기회의 순간(?)이었다. 또한 내가 제일 불쌍하다는 피해의식만 없었더라면 그렇게 괴로워할 일도 아닐뿐더러 해당 사건의 엔딩은 다르게 쓰였을 수 있던 순간들이었다. 언론사 입사 시험에 이렇게 수차례 낙방하는 것도 힘든데 이별까지 겪다니 불쌍한 나 자신, 그동안 모은 돈의 절반이나 날아가게 생겼다니 이렇게 불쌍한 놈이 어딨어 내가. 이런 자기 연민과 비뚤어진 피해의식(?)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때쯤 나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런 몇 차례의 경험들을 시나리오를 통해 꼭 다양한 사람들에게 확장해보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실제로 주식 실패 사례는 드라마 아카데미에서 습작으로 작성해보기도 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해준 지적이 뼛속 깊이 각인돼 있다.
“너무 나이브해, 나이브! 이게 뭐 죽을 만큼 큰 일이나 돼?”
돌망치로 뒤통수 제대로 후려갈겨진 느낌이었다. 그때 내 느낌은 아직도 생생한데, 당시 나는 옷 벗고 대중 앞에 선 것처럼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재료 삼아 극을 만들었고, 내심 ‘이 고통스러운! 이 안타까운! 이야기에 많이들 공감하겠지’ 더불어 ‘누군가 이 얘기가 내 경험이라는 걸 알아버리면 어떡하지? 너무 쪽팔릴 것 같아’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게 선생님의 호쾌한 일갈로 단숨에 무너지고 말았었다.
“나이브..?? 내가 나이브한 거였구나..??..? 이 정도면 별거 아닌 일이야?”
이때부터 멘털 약한 나 자신에 대한 객관화 작업이 시작된 것 같다. 세상 제일 심각한 상황에 빠진 것 같고 벗어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답답하다 느낄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나 자신에 침잠하기보다는 상황을 열거하고 차라리 잠이나 더 자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뭔가 예민한 것도 좀 무뎌지기 시작하고 좋게 말하면 건강, 나쁘게 말하면 단무지처럼 단순한 사람이 되는 듯했다.
멘털 약한 스스로에 대한 메타인지가 생겼다 치더라도, 이번에는 누가 보더라도 힘들 수밖에 없는 사건에 휘말렸었고 그 또한 나의 시나리오 작업의 소재로서 재탄생시켜보려는 참이었다. 근데 이번엔 작업하는 중에 스스로 질문이 든다. 과연.. 이보다 더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이게 그토록 힘든 일이었나.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가운데 문득 나의 사건의 3자가 되어 다시금 그날의 순간들을 돌이켜본다.
나이브함에서 벗어나기
세상은 넓고 인간은 많으며 사건은 무궁무진하다. 내가 했던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같이 나누고 힘이 되고 싶은 마음 자체는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다만 타인은 공감하지 못할 수준의 일들을 호들갑스럽게 얘기하는 것은 서로에게 감정소모이자 불필요한 작업이 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면 결국 사건을 바라보는 나이브함을 버리고 현실적 감각에 기반해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이번에 쓰는 글은 치밀하고 싶다. 사회생활 풋내기의 징징거림이 아닌, 조직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담긴 ‘진짜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한 번에 완성도 있는 글을 써 내려가진 못하더라도 그 가능성이라도 증명하고 싶다. 그렇게 한 단계 성장하고 싶다.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 순진한 선의만 갖고 냅다 들이박던 아마추어에서 조금은 깊이 있는, 가능성 있는 초보로 성장하고 싶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그렇게 내 작은 꿈을 하나하나 다듬어가며 다시금 몰입해 본다. 꿈에 조금은 다가갈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