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초대를 받았다.
우리 지역에 아름드리 오래된 나무가 있는 공원이 있다. 최초로 공원으로 지정받은 역사도 있고 400년 이상 이곳의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는 나무를 기리는 ‘수목제’였다. 코로나19로 아직은 조심스러운 때라 관계자 몇 분과 주변 이웃 분들만 모시고 소박하게 치를 예정이라며 전례적으로 지역 동장이 ‘초헌관’을 맡도록 되어 있으니 동의해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었다.
안되고 말고가 어디 있는가? 우리 동민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숭고한 제례에 그래도 동장인 내가 빠지면 되겠나. 다른 일정이 있어도 조정해서라도 이곳으로 가야 마땅하다 싶었다.
전화를 끊고 예전 자료를 찾아보았다. 전임 동장이 관복을 입고 제례상 앞에 엄숙하게 서있다. 절은 몇 번 하는가? 술잔 올릴 때 특별한 규칙이 있는가? 색다른 경험에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구름처럼 둥실 떠오르던 설렘은 5분도 가지 못했다. 뒤이어 걸려온 전화에서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꼭 들어야만 했다.
“아직은 여기 정서가..... 여자를 초헌관으로 하기는 좀.... 동장님이 이번은 해해 주시면 안 되시나요? “
음, 여자 동장이라 안된다는 거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밑바닥부터 뭔가가 자글자글 끓었다.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여자가 아니라 동장입니다. 동장이라는 직위로 참여하는 거지, 동장이 여자라 안 된다는 것은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마음 같아서는 '성차별'이니 '시대 역행'이니 등등 더 심한 표현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여자라 그렇다는 푸념들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고 있었다. 되도록 절제된 언어를 써야 했다. 그럼에도 상대는 다시 상의해 보겠노라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물론 그게 끝이었다.
수목제는 예정 그대로 진행됐다. 나는 그저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처럼 오색실로 동여맨 버드나무 아래 그들의 꼴만 지켜보았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헌관들이 도착했고 잘 차려진 제례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있다. 제례가 끝나고 사회자는 우리 동민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면서 각자의 소원을 나무에게 빌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동민 중에 여성은 있는가? 자꾸 삐딱선을 타고 싶어졌다.
저 나무가 시간을 되돌려 놓았는가. 지금은 400년 전 조선시대, 선비들이 노닐 던 곳에 감히 발을 들이지도 못한 채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다. 2021년 지금의 단상도 그렇지만 30년전 그날도 그랬다.
1991년 가을, 수습 딱지를 떼고 옮긴 부서의 업무 중 하나가 ‘전통문화 사업 지원’이었다. 공무원의 사무분장 중 가장 많은 단어가 ‘지원’ 일 거다. 웬만한 지원은 거의 공무원이 한다고 보면 된다. 하여튼 지금처럼 단풍이 들락 말락 할 때였다. 향교 제향이 있었다. 연례행사지만 워낙 크게 열리는 거라 시장, 의장,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할 것 없이 지역의 대표 리더들이 총출동하는 자리였다.
며칠 전부터 걱정이 되었다. 경험도 없는 데다 보조사업으로 치러지는 행사다 보니 담당자로서의 역할이 많았다. 일단 초청자의 참석여부와 앉는 위치, 축사의 순서 등등 지금은 행사를 주관하는 민간인이나 단체들이 알아서 잘 하지만 그때만 해도 주요 의전은 행정이 도맡아 했다. 마침 사는 집이 향교 근처라 아침 일찍 행사 장소로 출근했다. 전날 설치한 천막은 튼튼한지, 의자는 충분히 놓였는지, 의자에 오물이 묻어있지 않은지, 이것 저것 살피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데 난데없이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식전 댓바람부터 여편네가 제례상 앞을 서성이는가? 재수 없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나는 여편네가 아니라 담 당 공 무 원인데. 아무래도 음식 준비하느라 왔다 갔다 하는 아주머님을 말하겠지. 하지만 기대하는 대답 소리 나 도망치듯 나서야 하는 발소리가 없다. 정신이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면 좋겠는데, 처음의 아닐 거라는 확신이 이제는 아니길 바라는 소원으로 변하는 순간, 다시 큰소리가 났다.
이제는 거의 확실하다. 뒤를 돌아보니 호통 소리의 주인공은 내 뒤통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나? 나라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재수 없는 여편네’가 되어 있었다.
설마라는 여지를 두고도 엄습해오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어찌해야 할지 몸과 마음이 허둥댔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으니 어디서 남자 직원이 달려 나와 나를 질질 끌었다. 그날 나는 제례가 끝날 때까지 제단 아래 은행나무 곁을 서성였다. 가을빛을 닮아 곱게 물들어 가는 은행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유서 깊은 향교 앞마당에서 익어가는 가을의 고즈넉한 풍경 어쩌고, 그저 개나 물어가라라고 해라.
30년 전은 그랬다 치자. 컴퓨터, 스마트폰, 플랫폼, 키오스크, 모바일 뱅크니 모르는 용어가 우리 일상을 뒤덮고 그것들과 공존하며 나름 AI의 수혜자 인 양 살아가면서 의식도 바꿔놓았는가.
달라진 거라고는 그때는 은행나무, 지금은 버드나무라는 배경뿐. 그저 나무 아래를 배회해야 하는 여성 참여에 대한 생각들은 변하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정부는 양성평등을 부르짖고 있다. 덕분에 오히려 남자들은 역차별이란 주장을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소도시의 정서에는 변화가 없다. 지역사회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단체의 회장님들 대부분 이 단체 저 단체 회장 라인을 타고 옮기면서 그들만의 철저한 성벽 속에 담장은 더욱 높이 올려지고 있다. 여성 초헌관을 제시하는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날 저녁 나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혼자 삭히고 간다는 것은 '비겁한 방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를 생각하며 그저 '그럴 수도 있지요.'로 넘겨야 했지만 이 작은 일들이 모여 결국은 그렇게 해도 괜찮터라고 굳어질까봐 두려웠다.
며칠 후 페이스북 친구였던 칼럼니스트가 지역 신문에 칼럼을 썼다. 구체적인 언급 없이 지방도시의 분위기를 담아내면서 다른 자치단체의 변화된 모습을 소개했다. 이미 '최초 여성 헌관 배출'이라는 타이틀로 보도된 사례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여성 동장의 초헌관'을 반대했던 분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나 미움은 없다. 오히려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려는 활동은 존경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되는 속성이 있고 그 변화가 지역사회의 작은 결정에서부터 비롯됨을 조금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며칠 후 옆동네 비슷한 제향이 있었다. 다행히 지역 시의회 여성의원이 헌관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잘 아는 분이라 전화를 걸어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왜곡된 연대로 비칠까 봐 참았다. 그러한 것들, 일상과 맞닿아 있는 풍경들은 정치가 아니라 정서로 풀어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