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세계1위, 세르비아)의 공이 선심의 목을 강타하는 사건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2020년 9월 7일 미국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남자 단식 16강에서 조코비치는 세트를 잃을 위기에 놓였다. 순간 흥분한 그가 베이스라인 뒤로 공을 쳐 보냈는데 이게 선심의 목에 정통으로 날아간 것이다.
다행히 심판은 심각한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경기는 중단됐고 심판은 조코비치의 실격패를 선언했다. 테니스에서 홧김에 친 공으로 심판 등 코트 내 경기 진행요원을 맞추는 행위는 실격 대상이라고 한다. 게다가 대회 탈락은 물론 그간 승리로 받은 상금은 벌금으로 반납까지 했다. 이 일을 통해 조코비치는 “이번 일을 선수이자 한 인간으로서 발전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 순간의 격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지지른 실수가 그동안 어렵게 쌓아 올린 성과를 와르르 무너뜨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는 사건이었다. 인터넷 댓글 창에는 ‘성질 좀 죽이지’, ‘그거 잠깐을 못 참나’, ‘선수 자격이 없다’라는 등 비판과 안쓰러움이 번갈아 올라왔다.
살면서 이런 순간을 얼마나 겪을까? 큰 것이냐 작은 것이냐는 규모의 문제, 중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에 따른 정도의 문제 등 다양한 상황이 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당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평범한 일상에서 그리 많지 않다.
신문 기사를 읽고 댓글을 훑어보며 조코비치가 화가 많은 사람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나의 치명적인 실수도 비슷했다.
지방공무원 업무 중 3D로 알려진 것이 있다. ‘터미널, 시장, 묘지’. 이 세 가지 업무만 제외하면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는 의미였다. 이 세 가지는 잘해야 본전 치기라고 할 정도로 욕설과 집단민원, 각종 고소 고발이 난무했다. 물론 있는 상태에서 관리만 잘하면 다른 업무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변화는 오기 마련이다.
주민들의 불편을 호소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정책들이 펼쳐진다. 이전, 신설, 재건축이란 용어가 이 업무들과 결합되면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전통시장 관리업무를 할 때였다. 역대 성질 있는 남자 팀장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승진을 위한 인사고과에 상위점수도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리스크가 높은 보직이었다. 거기에 내가 발탁된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발탁인 줄 알았다. 1년을 지나 1년 6개월, 2년이 될 때까지 있었지만 발탁은 커녕 점수는 최하위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이 싫었다. 오늘은 또 누굴 만날지 걱정부터 했다.
팀원도 있고 팀장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하겠지만 시장 사람들은 팀원을 상대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여기 팀장 나와’라고 고함치며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악다구니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키가 작고 몸도 호리한 내가 벌떡 일어나 ‘전데요’라고 해도 ‘너 말고 남자 팀장 나오라고 해’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눈 똑바로 뜨고 오히려 ‘제가 팀장인데 무슨 일이시죠?’라고 대들 듯이 따지면 눈을 내리깔고 쳐다보다가 살짝 언성이 낮아지는 정도였다. 물론 그때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시장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었다. 계획은 이미 4, 5년 전에 있었지만 전임자들은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 채로 6개월이나 1년 만에 자리를 옮겼다. 처음 발령받고 1년 동안 미친 듯이, 하기 싫다는 팀원을 구슬려가며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녔다. 재건축 설계를 진행시키고 영업보상까지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다.
다시 6개월이 더 지났지만 나는 옮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필수보직기간이 1년이었다. 인사부서를 찾아가 상담했지만 ‘마땅한 후임자가 없다’,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 되겠냐’는 말로 오히려 나를 설득했다.
두 달 후면 2년째 되는 어느 날, 메일이 하나 날라 왔다. 중앙부처 파견자를 찾는다는 거였다. 보통은 7급 이하 직원 파견이 일상인데 노련한 경력자가 필요해서 6급 중에 선발을 한다는 거다. 한 지역에서 25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옮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젊었을 때 갔어야 하는데 그때는 관심 밖이었다. 처음에는 내용만 확인하고 메일에서 빠져나왔다.
조금 후에 전화가 왔다. 진상 민원으로 알려진 시장 사람이었다. 무허가 건물에서 영업을 하더라도 공익사업에 해당되면 어느 정도 영업보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걸핏하면 쌍시옷이 섞인 욕설에 듣기도 민망한 악담을 늘어놓았다.
그날도 여지없이 나에게 직격탄이 날아왔다. 다짜고짜 “네 까짓 게 팀장이냐? 포클레인으로 머리를 확 찍어 죽일 XX 년”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수화기를 쾅하고 내려놓았다. 사무실 직원들이 놀라서 쳐다봤다. 잠시 후 이 광경을 본 과장이 불렀다.
나는 과장이 위로해 줄 줄 알았다. 그동안 힘든 과정을 보아 왔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주겠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팀장의 체통’을 지키라는 거였다. 이런 악다구니에도 체통을 지키라니. 실망스러웠다.
솔직히 그런 진상 민원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듣고 있다가 녹취한다고 하면 그쪽에서 지레 먼저 끊는다. 그날은 그동안 참았던 감정을 추스르고 싶지 않았다. 나도 화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게다가 인사부서는 모른척하지 않는가.
보여준다고 했어야 수화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 조직은 도대체 왜 있는 걸까? 순간 화가 일었다. 과장 앞에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지만 하나도 죄송하지가 않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인사부서로 달려갔다. 그리고 파견을 가겠다고 했다. 6급 정도의 경력자가 생판 모르는 지역에 가서 근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앙부처와의 관계 때문에 반드시 한 명을 보내야 했던 인사부서에서는 큰 걱정을 해결해서 좋다는 반응이 있다.
그날 저녁 가족회의를 했다. 남편은 워낙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두둔하고 나섰다. 대학에 다니는 두 딸, 아직 중학생인 막내가 마음에 걸렸지만 중앙부처가 있는 장소가 그리 멀리 않은 지역이었다. 금요일에 집에 왔다가 월요일 일찍 근무지로 출발하면 되었다. 어쩌면 칠흑 같은 내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
새로운 희망, 어쩌면 여기보다 더 잘될 수도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온갖 희망 찬란한 이유를 갖다 붙이고, 근무지 근처 원룸 시세를 알아보면서도 즐거워야 하는데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침대에 누웠지만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졌다. 곤히 잠든 남편을 깨울까 봐 거실로 나왔다. 휴대전화로 이것저것 하릴없이 검색을 하고 있는데 시어머님이 나오셨다. 파견 결정을 하기 전에 가장 많이 의견을 나누었어야 할 분이었다. 의견이라기보다는 양해를 구하는 게 맞다. 그나마 지금은 집안 살림을 나눠서 하지만 내가 주중에 없게 되면 오로지 어머님의 몫이었다.
나는 어머님께 ‘죄송하다’고 했다. 어머님은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라는 말씀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왜 가려고 하니? 나도 힘든데 너는 어쩌자고 그 나이에 낯선 곳으로 간다고 하는 거니?라고 하셨다면 나는 어머님을 원망하면서 파견을 기어코 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아서 잘 결정했을까?
파견 결정을 하게 된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나 자신에게 정말로 가고 싶은 거냐고 확인을 해야 했다. 점수는 받지 못했지만 6급 선임이었다. 말이 파견이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 후에 나는 어느 위치에 가 있을까? 지금은 바닥이지만 2년이 지나면 자리는 옮겨질 테고, 조금만 견디면 나아질 수 있을 텐데, 성급한 판단은 아니었는지. 오히려 파견으로 지금보다 훨씬 뒤처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낮에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나는 판단이 흐려져 있었다. 차분히 생각하고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짚어내야 했다. 정말 가고 싶은 거야? 아니다, 나는 단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고 싶다기보다 힘들다는 표현을 ‘파견’이라는 도구에 의존한 것뿐이었다. 파견 결정을 너무 쉽게 했다.
이틀 뒤 나는 파견 신청을 취소했다. 추천해 준 부시장 그리고 인사팀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평소 안면 있는 인사팀장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할 수 없지 않냐고 했다. 다른 사람을 대체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린 탓에 인사팀만 궁지에 빠뜨린 나는 꽁지가 빠지게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뒤통수는 따가웠지만 앞통수는 홀가분했다.
파견을 가게 되면 모든 게 어그러진다. 남편, 아이들, 이곳에서의 모든 생활들, 모든 무질서의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물론 감당하면 된다. 그러나 파견은 나에게 결코 장밋빛 인생을 안겨주지 않는다.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무리한 꼼수를 부렸다.
한 가지 더, 조직은 나 한 사람쯤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파견을 신청했을 때 어쩌면 나는 누군가 나를 붙잡고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나란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다.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똑똑해도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조직은 없다. 조직 내에서 역할을 잘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조금 삐그덕 거릴 뿐, 거대한 조직일수록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남은 2개월을 여유 만만하게 보냈다.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은 미루기도 했고 포클레인으로 머리를 찍겠다고 하면 여기까지 가져 올 포클레인은 있냐고 맞받아칠 농담까지 즐겼다.
살면서 ‘순간의 화’ 는 지금도 자주 일어난다.
참아야 되는 화인지, 참으면 안 되는 화인지 잘 결정할 수 있는 어른, 그래서 조코비치는 ‘한 인간으로서 발전하는 계기’라는 말을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