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딸랑 '명퇴신청서'하나 제출하고 바로 퇴사 처리됐다. 30년이나, 소위 '누군가의 청춘'을 바쳤는데 그렇게 종이 한 장으로 끝낼 수 있다니. 온 정성을 쏟지는 않았지만 세월이라는 게 있는데, 아주 탄탄하게 생각했던 조직이라는 방호막 껍데기가 그리도 얄퍅한 것인지 참으로 씁쓸했다.
퇴사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편은 말을 아꼈다. 회사에도 단 한 줄, 단 한마디의 작별인사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궁금한 것은 그대의 몫'이었다. 덕분에 몇몇은 내게 끈질기게 물어왔다. 대부분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나도 특별히 답할 게 없었다. 다만 나와 상관있는 질문에는 뭐라고 하긴 해야 했다. ' 서로 얘기는 된 것인가?'
중요한 회의가 있던 날 남편에게서 두 번의 전화가 왔다. 첫 번째는 회의 중이라 받지 못했고, 20여분 뒤 걸려온 전화에서는 이 삼초의 뜸을 들이다가
"명퇴 신청서 내고 오는 길이야. 내기 전에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안 받길래 그냥 냈어."였다.
내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했을까? 이미 결정된 일에 대한 형식적 통보였다. 마치 집에 택배 상자가 도착했는데 이걸 안방에 놓아야 할지, 거실에 놓아야 할지 고민 중이라는 정도였다. 내게 물었어야 하는 것은 중요한 물건을 주문할 건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인데 말이다.
물론 남편은 수년 전부터 그만두겠다고 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의례히 직장인 다운 푸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구체적인 퇴직 시기와 이유를 들이댔다. 무시할 수 없어 귀를 기울였다. 좋은 가정생활의 지름길은 '소통과 경청'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봤으니까.
그가 하고 싶다는 일은 ‘농사’였다. 그것도 50평 남짓한 밭에 상추나 감자를 심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농사.
"그래 좋지. 나도 찬성이야, 그런데 그건 정년 이후에 해도 괜찮지 않나?"
작은 지방 도시, 결혼해서 내 집 하나 마련한 게 전부였다. 딸 셋에 팔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매달 목돈 들어가는 일은 없지만 한 달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은행보다 이율이 높다는 공제금을 들고 있지만 그건 미래 우리 가족을 위한 비상금이었다. 맞벌이라 경제 사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버는 만큼 쓴다는 말처럼 여유 있는 저축도, 투자도 쉽지 않았다. 몇 푼 모었을 때 한때 주식투자에 몰입했던 남편은 수년이 지나 원금까지 까먹고 '더 이상 주식은 안 되겠다.'는 이자만 남겼다.
되도록 좋은 말로, 때로는 우회로를 가듯 천천히,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활시위에 꽂아 남편의 가슴을 향해 직방으로 날렸지만 어느 것도 남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퇴직을 반대하는 나를 두고, '물질에만 빠져있는 못된 자본주의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남편을 오롯이 이해 못 하는 나 자신도 반성했지만 이건 아니라는 내 생각도 만만치 않았다. 서로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역지사지가 되기보다는 회피를 선택한다. 우리 부부는 생활 언어는 주고받았지만 미래 언어는 자꾸 숨겼다. 어쩌다 실수로 미래 얘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말들은 주로 공중에서 부딪친 다음 냅다 서로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집 안은 싸늘과 냉담으로 늘 한기가 돌았다.
그 한기에 따스한 공기를 넣어준 것은 막내였다.
위에 두 딸은 대학을 졸업하면 자기 앞가림은 하겠고 막내의 진로가 중요한 변수였다. 남편은 막내가 멀리 가지 않고 집 근처 고등학교로 가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2년 뒤 사직서를 낸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태였지만 내 마음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우리가 정한 것은 시기였지 방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언제 어떻게 사직서를 내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을 논의했어야 하지 않을까? 끝없는 질문이 솟아 나왔지만 질문을 받아야 하는 상대, 남편은 그런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며 신바람이 나 있었다.
나는 모든 게 불편했다. 퇴사라는 중요한 문제에 25년 이상 같이 산 ‘마누라’의 의견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고 질러대는 그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아무리 내 심정을 이야기했지만 남편은 '모두 잘 될 거야.'로 퉁쳤다. 그 모두 속에 아내인 '나'도 있는 건가?
사직 처리가 되자 남편은 명퇴금으로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에 텃밭이 딸린 농가주택을 샀다. 계약하기 전에 함께 갔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도 서울 사람들이 보면 시골인데, 남편의 집은 우리가 서울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정말 인적이 보기 드문 한적한 산 밑이었다. 전 주인이 잘 가꾼 탓에 여기저기 봄 꽃이 피어 그나마 위로가 될 만큼 주변 풍경은 그냥저냥 괜찮았다. 하지만 주택은 건축비를 아끼려고 대충 지은 데다 오래되어 낡고 허름했다. 내 눈에는 잘 보이는 흠이 남편에게는 언제든 극복할 수 있는 사소함이었다.
그 해 가을 남편은 가재도구 몇 가지를 가지고 시골로 가버렸다. 마치 처음에는 시골에 박혀 이쪽 집에는 별로 올 생각도 없던 사람처럼 한 달에 두어 번만 집에 왔었다. 부부란 참 묘했다. 같이 살 때는 몰랐지만 주말 부부를 하게 되니 오히려 내 쪽에서 신이 났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챙기지 않아도 되니 그저 막내와 내 입에 넣을 것만 궁리하면 되었다. 두 딸은 이미 밖에 나가 생활한 지 오래되었고, 시어머님은 아직은 정정하셔서 알아서 하셨다.
그러다 겨울이 되자 남편은 할 일이 없다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할 일도 없었겠지만 혼자 지내는 집에 기름보일러를 돌리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길어야 이 삼 개월이었지만 집에 하루종일 곰처럼 버티고 있는 남편은 나와 시어머니에게는 적잖은 부담이었다. 어머니야 동선자체가 단순했지만 나는 좀 복잡했다. 그렇게 바글바글 끊던 코로나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다시 일터는 예전의 다이내믹과 활성화를 요구했다. 가끔 늦는 날에는 남편은 '왜 늦느냐'며 잔소리 비슷한 걸 해서 '직장일 해 본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며' 쏘아붙이기도 했다. 전에 없던 현상이었다.
그렇게 한 해 겨울을 보내던 남편은 다음부터는 겨울에도 농가에서 보냈다. 지역 사람들과 친분도 쌓고 소소하게 마을일에도 참여했다. 주말부부가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그도 느꼈는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 5일제 농사를 유지했다.
직장에 다닐 때 남편은 조금은 게으른 편이었다. 하지만 때를 놓치면 얻는 게 없는, 대표적인 시간관리의 노동이 '농사'라는 걸 깨달았는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는 겪었지만 제법 먹을 만한 것도 가져왔다. 언제부터인가 책을 보며 나무와 산나물을 공부했다. 봄에는 청미래덩굴, 화살나무, 가죽나무, 엄나무에서 보드라운 햇순을 따왔다. 여름에는 싱싱한 상추와 오이를 대령했다. 우리 식구 먹기에 넘쳐나는 가지와 호박은 살뜰히 챙겨 겨울에 먹기 좋게 바짝 말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화가 나 있었다. 남편의 유유자적함은 책임회피의 다른 얼굴이라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남편이 농약 하나 주지 않고 여름내 잡초를 뽑아가며 귀하게 키운 상추를 씻다가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질구레한 집안일들은 백수가 해야 한다며 은근히 남편을 부추겼고, 병원이나 챙겨야 할 친척들 대소사에 들어가는 큰 비용에 대해서 기간이 도래하는 날까지 ‘돈타령’으로 압박했다. 사실 걱정했던 것만큼 돈 때문에 비루해지지는 않았지만 자꾸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퇴직 후 두 번째 봄을 만났다. 식탁을 차리고 의자에 앉으며 유난히 피곤했던 하루였다면서 싸리나무 햇순이라며 먹어보라고 했다. 나물은 질긴 데다 쓴 맛이 강했다. 시원치 않은 내 젓가락질이 못마땅한 지 남편이 서운한 듯 말했다. 나물을 좋아하는 마누라님을 위해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피해 가며 새순을 따는데 뭔가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나무줄기와 비슷한 색을 가진 뱀 한 마리가 남편을 노려보고 있더란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하다 넘어질 뻔했지만 오히려 뱀이 스르륵 나무를 타고 도망을 가더란다.
남편은 그때 장면을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실실 웃기까지 했다. 마치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서 수백 명의 적군이 자기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스스로 물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듣고 있자니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그 뱀 확 물어나 버리지. 왜 그냥 갔대? 그러니까 누가 당신더러 나무순 따오라고 했나? "
이 말속에는 걱정도 있었지만 첫 단어가 주는 온도는 분노였다. 남편이 모를 리 없다. 남편은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말은 남편의 얼굴 위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주 짫은 순간, 다음에 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그런데 남편은 아주 평온한 얼굴로, 그것도 웃음까지 머금은 표정이었다.
“미안해, 그동안 당신한테 못된 짓만 했지?.”
달빛이 고요한 어느 날, 시골집 뜨락에 혼자 앉아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는데 행복했다고. 그리고 그런 행복한 순간에 가족들 생각이 나면서 '왜 자기는 혼자 이러고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기더다. 그건 함께 하지 못하는 나름이 이유가 있었는데, 왜 그때는 자기의 의견을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지 어머니와 내가 많이 원망스러웠다고.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선택한 방향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억지로 나의 흐름 속으로 몰려오기를 바라는 것이 욕심이었는데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직장생활에 진저리가 나 있었고, 승진 따위에 미련이 없는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예전에는 남들이 직장생활이 지긋지긋하다면서도 사표도 던질 줄 모르는 비겁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비열한 인간은 자기 였다고.
다른 때와 달리 남편의 말이 길었다. 나는 고개를 식탁 아래로 떨구고 물컵을 빙글빙글 돌렸다. 사실 남편의 첫마디 '미안해'가 나왔을 때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었다. 그 뜨거운 기운이 눈가로 가는 걸 막기 위해 얼른 물을 마셨고 그 후로 컵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전에 친정아버지의 퇴임식장에서 딸이 써준 퇴임사를 줄줄 읽던 아버지가 좀 우스워 보였는데 지금 보니 어쩌면 그건 최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었던 공식적인 자리에서 우리 엄마는 존중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이 스스로 쟁취했다고 여겨왔던 자유와 한가로움이 실은 '누군가의 양해와 바라봄'이었음을 지금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의 과거 전력을 알고 있던 나는 그 덕분인지 모르지만 퇴임 이후 엄마는 아버지를 살뜰히 챙기시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리고 '뱀이 물어 버리라고' 한 건 잘못된 말인 것 같다고. 남편은 그깟 것 좀 물려도 된다고. 약이 좋아서 빨리 병원에만 가면 된다고 했다.
얼마 전 한 TV프로그램에서 허영만 만화가가 낙엽을 치우다 발견한 살모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스케치한 만화에 몇 자 적은 문장이 참 재치 있었다. 그가 스케치 마지막 구절은 공개하면 안 된다며 농을 쳤고 옆에 앉아있던 배우가 혼자 읽고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어댔다.
'어쩌면 이 살모사는 아내가 보낸 자객일지도 모른다.'였다. 공히 남편들은 아내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느끼고 있는 것인지? 남편에게 나타난 저 뱀도 내 영혼의 분노가 만들어낸 자객이었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