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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Aug 29. 2023

퇴직의 정석 1

나의 아버지

 큰 애가 두 돌일 때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했다. 30년 이상 몸담은 직장은 아버지의 노고를 기억하고 조촐한 퇴임 행사를 마련해 줬다. 아버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은밀히 퇴임사를 부탁했다. 나는 부족한 상상력을 보충해야 했다. 다행히 종종 사내 게시판에는 퇴직을 앞둔 분들이 남긴 이별류의 글들이 있었다. 그중 간신히 몇 개를 골라 짜깁기를 한 후 적당히 집어넣어 A4용지 2장을 채웠다. 퇴임식 날 아버지는 긴장된 모습으로 단상에 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자주 전봇대 위에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집집마다 전화가 보급되면서 전신주에 전기와 통신선을 연결하는 작업이 아버지의 임무였다. 그렇게 20여 년을 전봇대 위를 전전하다가 까마득한 후배가 생기고, 어느 정도 경력가 연륜을 인정받았는지 드디어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술과 외근으로 찌들어 있었다. 저녁 11시가 넘으면 비틀비틀 넘어질 듯 몸을 흔들며 동네 초입부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남동생 이름을 불러댔다. 


 집으로 들어온 후에도 엄마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거나 자고 있는 우리 삼 남매를 깨웠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의 생리주기처럼 아버지에게도 '그분이 오셨는지' 주기적으로 우리를 불러 앉혔다. 물어보는 말은 늘 똑같았다. 밥은 먹었냐? 공부는 잘하고 있냐?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은 명료했다. 그저 '네'였다.


 달게 자던 잠을 느닷없이 쫓아내고 무릎을 꿇은 삼 남매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나마 나이 차이가 많아 아직 어린애였던 막내는 억지 뽀뽀를 해주면 다시 잘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지만 나와 남동생은 아버지의 맥락 없는 말들을 다 들어야 잘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은 어린 우리에게 인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 줬다.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을 혼자 쏟아낸 아버지는 발을 씻으러 나갔고, 그제야 남동생과 나는 엄마의 재촉을 받으며 이불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로소 우리 집에 고요가 찾아왔다.


 고요는 찾아왔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유난히 맑고 흰 달이 빤히 방 안을 들여다보는 날은 더욱 그랬다. 누군가 쫓아오지는 않을까. 내일 아침, 친구를 만나면 창피해서 어떡하지? 그런 종류의 것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사는지, 아버지의 소란을 문제 삼는 이도 없었고, 다음날이면 말짱한 정신으로 동네 어귀를 빗질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생경한 그림처럼 어색했다.


 아버지의 고약한 술버릇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전신주에 매달린 채 감전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때부터 시작됐다. 말이 없고 얌전했던 아버지는 술만 입에 대면 험악해졌다. 동료의 죽음이 마치 자기 책임이라도 되는 양, 고단한 삶의 끝이 어이없는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끝없이 비난의 대상을 찾았고 끝없이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하는 술을 입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들이부었다.  술에 장사가 없다더니 퇴임이 임박할수록 아버지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평생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언저리를, 전봇대 위와 아래를 어정거리던 아버지는 처음으로 많은 이들이  올려다보는 자리에 섰다. 가족석에 엄마와 나, 남편이 앉았다. 아이는 내 무릎 위에 앉혔지만 시간이 지나자 지루함에 버둥거렸다. 조용히 아이를 달래 가며 움직이지 못하게 꼭 잡았다. 외롭고 고단했던 직업 전선을 뚫고 나오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언어가 아닌 새파랗게 젊은, 퇴직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는 딸내미가 쓴 원고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읽었다.


 기본적인 인사와 회사에 대한 고마움을 넣기는 했지만 30년 이상 뼈를 갈아 넣은 직장에 대한 회환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이 모든 걸 감수하고 뒷바라지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슬며시 끼워 넣은 덕에 엄마는 고개를 한껏 치켜세울 수 있었다. 이날의 풍경은 오랫동안 '퇴직'의 정석처럼 남아 있었다. 살아온 과정이 어떠하였든지 적어도 누군가의 수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리였으니까.


 '퇴직의 정석 2'는 다음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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