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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Dec 21. 2023

두통을 앓다

너무 잘하려고 하는 걸까?

 나는 두통이 없는 편이다. 주변에서 누군가 머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런 상황을 겪지 않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 몰랐다. 물론 여성 호르몬이 넘실 대던 시기에 간혹 두통이 찾아오긴 했다. 하지만 원줄기가 생리통이라 하루만 지나면 말짱해져서 두통의 힘듦은 내 삶에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다. 굉장한 오판이었다.   저녁부터 시작된 두통은 새벽 2시 32분에 기어이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스마트폰을 보다 책을 들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런 게 불면이구나. 거의 4시간이나 누워 있었지만 오만 가지 생각으로 뒤엉킨 머리를 끝내 비우지 못한 채 출근 준비를 했다.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되도록 이면 만나고 싶지 않은 ‘불면’이라는 손님, 많은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만난다는데 속히 헤어지는 게 상책이겠다. 하지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아침을 먹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타민 두 알을 털어 넣었다. 부러 상쾌한 듯 현관문을 나서면서 마음을 추스른다. 운전대를 잡자 두통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엄밀히 따지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야 하는 부담에 밀려 머릿속 어딘가에 잠시 내려가 있을 것이다. 다시 튀어나오지 않게 하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정말로 몸에 문제가 생긴 건지. 단순히 복잡한 생각으로 얽혀버린 뇌회로의 과부하인지. 전자는 병원을 가야 하니 일단 머릿속을 뒤져본다.       


 12월이면 거의 모든 공무원들이 다음 해 예산편성을 두고 의회와 신경전을 벌인다.  지난 4일부터 벌써 2주째 의회 상임위원회와 거친 씨름을 했다. 예산이 너무 많네, 쓸데없는데 투자하네 마네, 등등  자치단체 실무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귀는 틀어막고, 무조건 공무원을 압박하려는 심기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뒤로 물러선다면 기껏 올린 예산은 무용지물처럼 보인다.  국회의 부처별 예산안 심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양태들이 지방으로 내려와 축소판으로 벌어진다고 보면 된다. 국가 경제도 긴축재정인 마당에 지방이라고 풍족할 리가 없다. 이미 예산 부서로부터 한 차례 난도질을 당한 예산이라 모두 무사히 통과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내년도에도 주민들로부터 요구받은 일들,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래서 의회 심의 수일 전부터 직원들과 긴밀하게 준비를 한다.


 예산서가 만들어지면 보조자료를 통해 대략적인 쓰임을 익히고 다음에는 팀별로 모여 앉아 사업별 추진방법을 논의하면서 명확한 논리와 이유를 축적한다. 그 과정에 부서장은 모든 담당업무의 지휘자이면서 부서원의 대변인이 된다. 예산에 들어있는 모든 산출내역을 달달 외우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고 단지 흐름과 쓰임을 잘 엮어 두어야 한다. 공부를 해야 한다. 순전히 예산 편성을 위한 심의회지만 업무 전반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놓는 자리이기에 폭넓은 학습이 필요한 셈이다. 어느 때보다 부서원들에게 많은 자료를 요구하고, 부서원들도 자료준비에 초과근무까지 한다. 부서원의 자료 상태에 따라 나의 신경도 날카로워진다.


 마음을 가다듬고 의연해지려고 하지만 궁색한 답변이 나올까 불안이 엄습해 온다. 그렇다고 표시 낼 수도 없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오늘은 막바지 최종 심의가 있는 날이었다. 이미 세 차례나 불려 가 답변을 했고, 나름 논리를 구성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의원들의 마음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시간 제약이 있어 한없이 설전을 보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대충 하고 나왔더니 4건이나 삭감되어 있었다. 그게 바로 어제였다.


 어제는 퇴근 후 친구들과 만나 비싼 소고기를 먹었다.  같은 직장 동료로 만나 이젠 친구로 지낸 지 30년. 꼬박꼬박 회비를 걷어가며 해외여행을 다짐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지난번 간신히 대만을 다녀온 게 전부였다. 그래도 각자의 생일과 신년회, 송년회는 꼭 빠뜨리지 않고 모였다. 든든한 재정에 맞게 그 비싸다는 간장게장 정식이나 한우 스테이크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우리의 소소한 일상도 함께 씹어 먹는 게 큰 낙이다. 거나하게 저녁을 먹고 근처 가까운 카페로 이동했다. 저녁이라 ‘불면’이 걱정되는 나이, 모두 대추생강차를 주문했다. 번화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고 생각보다 빨리 주문한 차가 나왔다. 도자기에 진심인 주인의 취향인지 오지항아리처럼 생긴 찻잔 속에 잣과 대추가 둥둥둥 춤을 춘다. 찻잔을 들고 마시려고 입술을 오므리는데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슬쩍 보니 단체톡방이었다. 퇴근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 그때서야 부서별 삭감내역이 공지된 것이다. 이때까지도 누군가는 퇴근을 하지 않았구나.


 친구들은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고 나는  한 모금 마실 때 함께 밀려 들어온 잣과 대추알갱이를 야무지게 씹어대며 문자를 살폈다. 삭감의 이유를 찾기에 너무나 궁색한 내역이었다.  이건 뭐지? 내 설명이 부족했나? 막연한 궁금증에 고개가 절로 좌우로 저어지는데 달콤하다 생각했던 차 맛이 쓰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친구들의 입담에도 불구하고 나는 섞이질 못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어떻게 만회를 해야 하는지, 다시 논리를 짜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바로 두통이 시작됐다.   9시 30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부랴부랴 씻고 침대에 누운 시간이 11시였다. 잠시 사라진 듯했던 두통이 또다시 밀려왔다. 이마와 전두엽 사이, 원활하던 뇌회로가 갑자기 끊겨 작은 불꽃을 내며 타들어가는 것 같다. 얼른 작업반을 불러 끊어진 선을 이어야 할 텐데 나의 신체 시스템들은 그저 방관만 하고 있다. 약을 먹을까 하다 습관 되면 안 될 것 같아 참기로 했다. 그렇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뒤척인 것이 바로 오늘 새벽 2시 31분까지였다.  


 20여분 남짓 운전을 하다 보면 근무지가 있는 건물이 나타난다. 좀 이른 출근으로 도로도 막히지 않았고 주차장도 여유롭여서 마음에 드는 자리에 차를 밀어 넣고 나왔다.  사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삭감된 예산내역을 다시 들여다봤다. 부서장의 입장이 아니라 시민의 입장이 되었을 때 이 예산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했다. 시의원은 말 그대로 시민의 뜻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공무원의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내년도 사업계획을 되짚어보며 삭감된 예산의 필요성을 매칭해본다. 그중 2건은 반드시 살려야 하고, 나머지 2건은 좀 줄여도 괜찮을 듯했다. 담당 팀장들과 실무자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10시에 다시 예산심의장으로 올라갔다. 본청과 의회건물은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눈이 라도 올 것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이 구름다리 통로 위 유리천장에서 옆구리에 서류를 낀 채 줄지어 가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기려고 하지 말자' 의회 건물에 첫 발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오늘은 조목조목 따지는 의원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봤다.  삭감을 주장하는 그들의 언어에도 불안함이 묻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네들은 경험이 없었다. 정말로 삭감했다가 어떤 타격을 입게 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무원인 나는 어쩌면 그런 점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민을 위한 것인데 이걸 깎는다면 여러분이 판단하는 필요한 예산의 기준은 무엇인가요?'라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주저리주저리 내놓았던 단어의 배열에 담겨 있었을 거다. 그러니 마치 무슨 투사라도 된 것인 양 의원들의 지적에 발끈하고 반박해 왔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두통은 모든 상황을 뒤집어 놓았다. 그렇게 예산을 살리고 싶어 하는 나조차 필요성을 확신할 수 있는가? 전날 의원들과 예산의 쓰임에 대해 옳고 그름이 있는 것처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것과 달리 오늘은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오히려 예산이 세워지는 만큼 적정하게 사업을 추진하겠노라고 저자세로 돌입했다. 


 의원들도 전날보다는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물론 그중 몇 명은 모조리 삭감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지만 동의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업을 위해서는 본예산에 반영되는 것이 당연히 좋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추가경정예산이라는 게 있다. 모든 사업들이 본예산에 편성되어 물 흐르듯 시간과 절차를 밟아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보완책을 마련한 것이다. '관료화'라는 것은 겉보기에 그저 옛날 방식만 고수하고 새로움을 거부하는 답답한 모양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부로 들어가면 수많은 절차가 기계식으로 잘 정리된 매뉴얼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공무원들의 행태가 밖에서 보면 움직이지 않는 돌산처럼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상당히 유동적이고 나름 바쁜 직장인의 모습과 같게 된다. 


 이틀 후 본예산 심사결과가 나왔다. 아무것도 삭감이나 조정 없이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었다. 좀 허탈했다.

이렇게 그냥 세워주면 될 것을 무엇하러 가라 오라 세 차례나 찾아가게 만들었는지 살짝 화가 날 법도 했지만

혼자 씁쓸하게 웃었다. '불면'의 고통을 가져온 두통은 보충 설명을 하고 돌아온 날 오후에 사라졌다.


너무 잘하려고 했나 보다. 왜 나는 본예산에 올린 예산이 전부 세워져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까? 이런 마음도 오래된 관행에서 왔다. 본예산 심의 때마다 들어왔던 이야기들. 심심치 않게 자기 부서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부서장의 능력 부족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큰소리로 말해왔던 선배들의 말들이 내게도 남아 있었다. 그 예전의 부서장들은 시의원들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며 예산확보를 해왔다. 주요 예산은 그 지역이 해결해야 할 중요이슈에 꽂히기보다 힘 있는 의원을 중심으로 힘 있는 의원과 친밀한 부서에 집중됐다. 그 힘의 의미는 인사와 예산이 가장 컸음이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결국 예산의 한정으로 만만한 부서는 대폭 깎이는 사태를 겪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힘겨루기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서장들은 직원들을 달달 볶아가며 보조자료를 만들게 하고 없는 논리를 내세우느라 머리가 아프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나의 의식은 변화를 쫓지 못했다. 예전보다 지방의회 의원들은 공부를 많이 한다. 특정분야 전문가도 있고 소신껏 자기 지역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도 많다. 친분이 있다고 봐주기식으로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음에도 어떻게든 예산은 살려야 한다는 무논리의 반박만 고집했으니 두통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심의를 마치고 직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시의원들이 오히려 볼 수 있음을 인정했다.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집행했던 예산들이 과연 시민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예산은 통과되고 두통은 사라진 겨울 오후,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향기는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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