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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Jan 06. 2024

안녕, 나의 아저씨

배우 이선균을 보내며

  3년 전, 둘째 딸에게 <나의 아저씨>를 추천받았다. 직장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사는 둘째는 명절연휴에도 집에 오지 못했다. 풀타임 근무는 아니지만 집에는 올 수 없었던 무료함을 드라마로 때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시간 날 때 볼 것을 권했다. 자기의 '인생드라마'라면서. 나는 그저 예의상 그러마 했지만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드라마가 TV를 통해 방송되기 전 짧게 편집된 홍보 영상을 보면서 그저 그런 불륜 드라마인 줄 알았다. 남녀주인공의 나이 차이 때문이었다.  여주인공인 아이유(이지은)와 남주인공 이선균(아저씨)의 로맨스를 상상했다. 시크하지만 어느 순간 어려움에 처한 옆집 소녀를 도와주고 바로 흑기사로 등극한 아저씨. 그러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나이 차이로 주변의 시선이 두렵지만 극복해 가는 스토리?  아무래도 딸아이가 이십 대 초반이니 그런 로맨스를 좋아하겠지 싶었던 거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연휴에 남편과 나는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보게 되었다. 16부작이라 분량이 꽤 되었지만 2주일 정도 시간을 들였다. 초반 3부까지는 호기심으로, 4부에서 6부는 과도한 몰입감, 7부부터 시작된 등장인물 각각의 사연이 펼쳐졌다. 메인 줄거리에 양념처럼 얹히는 개별 사건들이 점점 흥미를 더해줬다. 그렇게 12부를 넘자 약간 늘어지는 듯하더니 13부를 지나 16부에서 온전히 막을 내렸다.


  조금 스포를 하자면 말 그대로 이선균 배우의 역할인 박동훈 부장은 요즘 시대 정말 옆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다. 말수는 적지만 사려가 깊어 물 한잔을 마시면서도 마음에 감춰둔 비밀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타입이다. 그렇게 부담 없고 따스한 어른, 지금도 특유의 중저음이 부드러운 울림으로 남아있다. 스토리도 탄탄했고

실제 같았던 등장인물의 천연덕스러운 연기,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회에 잔잔하게 파고드는 감동이 있었다. 


 앤딩에서 갈등과 괴로움을 건너고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따스한 눈 맞춤에 내 호흡까지 편안해졌다. 물론 이 기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이 감동스러운 앤딩을 두고 남편이 '두 사람은 이제 사귈지도 모르겠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내 몸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온갖 짜증이 한데 모여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언제 이렇게 삼류 드라마에 중독이 되었는가. 대꾸할 가치도 없어 그냥 눈만 하얗게 흘겨줬다. 


 그 이후 그가 출연한 작품을 조금씩 챙겨볼 만큼 관심이 생겼다. 마약 투입 의혹이 발생했을 때도 놀라움은 있었지만 며칠 지나니 그저 그랬다. 이미지를 생각하면 살짝 배신감도 들었지만 이미 연예인은 비슷한 사건이 많아 덤덤해졌다. 배우는 다른 사람의 인생이지만 마치 그의 인생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무대 위 인생은 늘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지 않았을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동정심마저 들었다. 이런 호의도 <나의 아저씨>에서 만난 배우 이선균의 이미지였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지만 '뭔가를 먹기는 했지만 마약인 줄을 몰랐다.'라는 진술을 믿어주고 싶었다. TV뉴스에서 접했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12월 23일 3차 소환조사를 받았다는 뉴스가 대서특필 되었지만 12월 25일 오후에 남편과 나는 넷플릭스에서 그의 최신 작품인 <잠>을 보았다. 처음에는 공포, 스릴러인 줄 알았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무속인이 나오고 귀신이 등장했다. 잠을 자는 이선균에게 죽은 아랫집 영감의 영혼이 들어왔다. 위험을 느낀 아내( 정유미)가 정신병자를 자처하며 남편 몸에 숨어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솔직히 영화는 마약 투입 의혹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우리 주변에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이 있지만 굳이 무당까지 나왔어야 할까? 그동안 이선균 배우가 맡았던 역할들이 매우 현실적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영화는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일종의 괴리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얕은 재미는 있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삼일이 지난 12월 28일, 이선균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충격은 놀라움, 생각보다 너무 컸다.  혹시 거짓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심에 몇 차례 새로고침을 해가며 수십 번 검색했다. 조금씩 확실해지는 기사에 두 번째가 다가오는 감정은 슬픔이었다. 단순히 의혹만 받은 상태였는데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곁에서 따스하게 감싸줄 누군가가 없었는가,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지, 그냥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12월 30일, 연말이면 연예계의 총결산이 이루어진다. 즐겁고 호화로운 쇼를 준비했을 텐데 갑작스러운 이선균의 죽음으로 분위기는 다운되어 있다. 대부분 배우들의 옷차림은 올 블랙이고 표정은 슬프다.  직접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고인이 된 배우의 명복을 빌었다. 그렇게 화면을 보고 있는데 며칠 전 보았던 <잠>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실은 그의 비보를 들었을 때 이젠 유작이 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계속 생각났다.


 이선균의 몸속에 들어가 있던 아랫집 영감이 어쩔 수 없이 그이 몸에서 분리된다. 온통 빨간색 부적으로 가득 찬 집에서 이선균은 커튼을 열고 두 팔을 벌리며 누군가에게 이제 데려가라고 외친다. 창문을 통해 밝은 빛이 잠깐 비추는 듯하더니 이선균은 힘없이 푹 쓰러지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영화의 <잠>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주인공을 그렸지만, 2023년 12월 30일 배우 이선균은 영원히 잠들었다.


 <잠>이라는 영화가 무속적인 이야기로 뜬금없다고 했음에도 주인공이 고인이 된 지금 나는 이 과학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 연결고리에 집착한다. 


 <나의 아저씨>는 <잠>이라는 영화를 남기고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서 잠들었다. 이제 그는 지안 할까?


"'지안(至安), 편안함에 이르렀나?"


 <나의 아저씨> 앤딩장면에 나오는 대사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지안(아이유)을 만나고 뒤돌아 가며, 박동훈(이선균)은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묻는다. 이제 이 말은 그를 애도하는 누군가가 그에게 되묻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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